훌륭해지려 노력하지 않겠습니다.(5-5)

존경하는 내 아버지

by 소명작가

늘 집에서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내던 엄마는 그 집에 없었다. 엄마는 추운 양옥집을 팔고 들어간 따뜻한 아파트를 좋아했다. 11층이라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그 집을 좋아했었다. 운전자의 한순간의 잘못된 부도덕한 판단은 한 가족에게는 엄마를 잃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반려자를 잃었다. 난 아버지를 고향 땅에 혼자 두고 온 나는 그저 죄인이었다.


5년 지난 9월 난 새벽에 또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새벽에 운동하러 나선 길에 차에 받혔다는 소식이었다. 중환자실에 계시지만 살아계시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오른쪽 다리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연락이었다. 짐을 꾸렸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엄마를 떠나보낸 그 병원에서 정형외과 병동 8인실 터줏대감 창가의 자리에 누워계셨다. 다리는 다행히 수술로 심을 박아 어스러진 뼈를 맞추었다고 했다. 허벅지 전체가 차에 밀리고 돌에 까인 상처로 딱지가 앉았다. 추석이라 간병인이 고향에 간 주간에 내가 대신 아버지를 돌보기로 했다.

환자를 돌보는 몇 가지 방법을 배웠다. 머리를 감기는 법, 대, 소변을 받아내는 법, 옷 갈아입히는 법, 목욕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네일가게에서 손발로 사람을 섬긴 경험이 간병하는 일쯤이야 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했다. 동생은 언니가 못 하는 일이라 다른 사람을 찾자고 했지만 미국 노동자에게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류했다.


그리고 한 주 더 아버지 간병을 했다. 아버지는 내게 고기가 먹고 싶다. 누가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벌써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맛있는 걸 얼마나 많이 해주었겠냐고 말씀하셨다. 난 아버지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시면 병원 근처에 사시는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아버지가 갈비가 드시고 싶대요”

“3시간 뒤에 오너라”


택시를 타고 시댁에 도착하면 어머님이 내 밥상을 차려 놓고는 기다렸다.

“너, 얼른 먹고 병원 가져가라.”

몇 끼에 내놓을 갈비와 김치를 주셨다. 몇 번을 식당에 주문하듯 아버지는 드시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셨다. 몇 번을 어머님은 정성껏 만들어 주셨다.


내가 미국 입국할 즈음에는 거의 회복하시고 워커를 끼고는 몇 발짝 내디딜 만큼 회복이 되셨다. 아버지와 병원에서 지낸 2주간이 후딱 지났다. 그리고 7년이 훌쩍 흘렀다. 이국의 삶을 사는 내 가슴엔 늘 불효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팔순 잔치는 참석하고 싶었다. 남편도 가자고 했다. 생신 날짜에 맞출 수 없기에 학교가 종강하고 겨울방학 3주간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2020년 2월 나와 남편은 한국을 방문했다. 유튜브에 중국에 심상찮은 독감이 번지고 있다며 한국 방문을 만류하는 이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방문한 2월 초 우린 엄마가 천국으로 가신 후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거제에 있는 새로 문을 연 콘도를 빌렸다. 1박 2일 가족이 모여 맛있는 것을 먹고 목욕도 함께했다. 아버지 팔순 기념 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 한국 대구에서 코로나 확진이 사태가 커졌다. 늘 우리를 보내시며 울던 어머님은 얼른 떠나라며 오히려 등을 떠밀었다. 또 만나자며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한국을 떠났다.


그 후 코로나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한국에서는 전무후무한 전염병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비교적 늦게 징후를 알아챈 미국도 5월에는 모든 업소의 문을 닫고 집에 거주해야 했다.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가족들도 집에 모여서 지냈다. 아이들 자랄 때 일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겼는데 코로나 덕분에 세끼를 모여서 먹으니 참 좋았다. 행복했다.


그 행복을 뚫고 막내가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폐에 생긴 암으로 시한부 6개월 선고받았어.’ 이건 또 무슨 소식이지 했다. 또 무서웠다. 아버지를 어찌 보내야 하나? 아버지를 살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한국에서 제일 잘한다는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갔으나 같은 답을 들었다. 대장암 완치 판정을 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2센티미터 종양이긴 하지만 수술은 안 한다고 했다. 4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과정을 이기고 생긴 암이라 치료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난 코로나로 집 밖도 안 나가던 시절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 코로나가 진정되고 미국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인지라 아무도 나의 한국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내가 귀국한다는 소식은 아버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두 선명한 말은 안 하는데 미국 사는 큰딸이 코로나 와중에 방문한다니 더 불안해하시며 나의 귀국을 동생들을 통해 막으셨다.

난 2020년 7월 기어이 한국을 방문했다. 공항 상황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항은 예전의 만남과 기쁨이 나누어지던 장소가 아니었다. 모든 근무 요원들은 특수 방호복을 입었고 외국 입국자들은 잠정 전염 병자로 철저하게 분류되고 감시를 받았다. 한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나는 관찰 대상자였다.

공항에서 광명역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KTX를 타고 마산에 도착해 사천 보건소에서 보낸 보건소 직원에 의해 집까지 수송했다. KTX에서도 일반인과 입국자는 철저하게 분류했다. 14일간 격리 기간에 아버지와 밥도 같이 못 먹게 했다. 14일 집에 온 보건소 직원에게 검사를 받고 격리 해제가 되었다.

난 집에서 아버지 식사만 준비해 드렸다. 철들고 내가 아버지 밥을 14일간 아침, 점심, 저녁을 해 드린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누군가 건강한 음식을 준비해 함께 먹는 것만으로 기뻐하셨다. 그리고 꿈같은 20일을 아버지와 보내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아버지에게 전하고 함께 교회 출석하고 등록을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교회 생활을 아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난 다시 하늘 아버지께 아버지를 부탁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21년 1월 학교가 방학을 하자 다시 한국으로 갔다. 6개월 선고 후 8개월이 지나던 시점이었다. 아버지에게 한국 간다고 말씀드리니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지난해와 같은 과정인 14일 격리를 마치고 아버지 계신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인근 병원에서 진통제 치료를 받고 계셨다. 기침으로 음식을 드실 수 없던 아버지는 코 줄을 통해 위에 유동식을 넣고 계셨다. 기침 때문에 말씀도 하실 수가 없었다. 주로 공책에 서로 할 말을 적으며 의사소통을 했다.


내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병한 지 4일째 새벽 아버지는 주무시다가 천국으로 가셨다. 마지막 날 아버지를 운동하는 곳에 모셔드리면서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란히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2일장을 하던 때였다. 신속한 장례가 준비되었다. 아버지는 고향 바다가 보이는 곳에 엄마와 함께 나란히 묻히셨다. 아버지 모든 장례가 마쳐지던 순간 한 사건이 기억났다. 아버지를 두고 돌아서야 하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엄마 장례식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는데 아버지 장례식에서는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 장면의 의미가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서는 순간 문이 열리듯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보였다. 격리하는 동안 여동생이 주말에 와 아버지를 간병하는데 아버지는 나랑 밥을 먹으러 횟집에 가야 한다며 콧줄을 빼고 나가자고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동생이 선망 증세라고 했다. 초기 치매 증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동생이


“아빠, 언니랑 밥 못 먹어요. 언니 지금 격리 중이라 외출이 안 돼요. 격리 끝나고 밥 먹으러 가요.”


그랬더니 얌전해졌다는 말을 집에 와서 건넸다. 아버지 치매 아니셨구나. 미국에서 화상 통화로

“아빠, 한국 가면 맛있는 거 먹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했던 말을 기억하신 것이었다. 치매 증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14일 자가 격리 설명은 않고 만나 밥 먹자는 말을 했는데 내가 한 거짓말 때문에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을 빼면서까지 나와 밥을 먹기 위해 애를 쓰신 것이다. 마지막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미국에서 온 딸 밥을 먹이고 싶었던 거였구나!


아버지 사랑 고백의 언어는 ‘밥 먹자’였다. 엄마가 이 땅을 먼저 떠난 후에 아버지를 만나러 온 자식들을 위한 가장 큰 배려는 식사였던 것이었다. 아!!! 너무 늦게 알았다. 난 아버지를 두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오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 더 이상 훌륭해지지 않을 거야. 난 이미 훌륭해. 아버지가 생명을 다해 사랑한 나는 아버지의 딸이야.’ 내 속에서 이 말을 계속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하늘 내 아버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내게 세상 최고의 아버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버지는 내게 세상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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