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이민의 삶 속으로
한국에서 보험도 해지하고 어머님이 주신 전세금도 미국 유학 생활 3년이 지나니 은행 잔고가 비었다. 떠날 땅이 아닌 살아야 할 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다. 남편이 교회 사역을 해서 사례를 받았지만 그건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충분하지 않은 돈이었다. 내가 공부한 학위로 일을 구한다고 해도 그 돈으로 충당할 수 있는 미국 생활이 아니었다.
그즈음 우리 교회 여성 교인 상당수가 네일 업계에 종사하고 있었다. 3년 남편의 유학 기간 내내 나는 이방인이었다. 모두 생업에 뛰어들어 생존을 위해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상담 공부만 하는 나는 그들의 눈에 호사스러운 이방인이었다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어도 내게 말을 붙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교회의 소소한 일은 호사스럽게 공부하며 사는 내가 하기 원했다.
나도 네일을 배우자.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큰 교회 담임목사로 당당하게 살고 싶은 꿈은 깨졌다. 여기서 미국의 고달픈 삶에 정착하고,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 한다면 나는 저들처럼 고단한 미국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야 내가 하는 말이 저들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쉽게 왔다. 교회에 자녀 셋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온 엄마가 있었다.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다 시댁의 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큰 네일 가게 둘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네일 가게 매니저로 일을 시작했다. 그 가게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처음엔 금요일 하루만 일하는 조건으로 출근했다. 네일 가게 출근해서 하루 종일 놀아도 돈을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일은 재미있었다. 멀리서만 존재하던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도 흥미로웠다.
하루의 노동이지만 수입이 생기자 정신이 여유롭고 생활이 여유로워졌다. 여름이 되어 일손이 달리자 내게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보라고 했다. 일주일 중 하루 일하던 일상이 이제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여름이라 손님이 몰려왔다. 초보라 이일 저 일 가려서 하지 못했다. 발톱을 깎고 손질하는 페디큐어도 해야 했다.
평생을 말만 잘하면 돈이 생기는 일을 하고 살았다. 과외로 학생을 가르치면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미국의 주 언어는 영어였다. 한국인이 살긴 해도 한국의 수요와 미국에서 수요는 달랐다. 간간이 한국 입국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토요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을 했다. 그것이 필요한 생활비의 액수와 간격이 컸다.
몸으로 하는 일을 처음 시작하고 몸에 몸살을 달고 살았다. 나보다 먼저 미국 생활에 적응한 경험이 있던 매니저는 나에게
“1년이 지나야 몸이 만들어진다. 1년만 지나가자. “
말했다. 출근 시간에 데리러 온 차에 눈을 못 뜨고 몸을 싣는 내게 늘 말했다.
일은 재미있었다. 단시간에 예쁜 손발톱의 결과물을 보는 일, 내 수고로 예뻐진 그들의 손발의 모습으로 기뻐하는 일을 보는 건 내 생애 첫 경험이었다. 잠시 생활비가 필요해서 억지로 하게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니저의 말대로 나는 손과 발이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도 갖게 되었다. 내 삶이 성도들보다 더 고단해지자 그들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응원해 주었다. 그들의 힘듦을 나에게도 나누었다. 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난 성도들의 친구가 되었다.
교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노동을 핑계 대며 교회 일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는 짐을 기꺼이 나누는 분위기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당번을 정해 점심 식사 준비를 하는 일에 힘을 다해 도왔다. 토요일 힘든 일과를 마치고도 주일 식사 당번을 자청해 감당했다. 어떤 이는 밤을 새워 준비하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일주일 내내 반찬을 만들고 국을 만들어 가져오는 이도 있었다. 교회 점심 식사 시간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위로를 한국 음식으로 위로받는 기쁨의 시간이 되었다.
네일 라이선스도 준비했다. 잠시 미국에 머물 유학생이 아니었기에 미국에 살기 위해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라이선스가 생기니 대우도 달랐다. 기술이 좋아지니 교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결손이 생기면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부만 하느라 가르치기만 하느라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노동의 고단함은 숙면을 선물했고, 지식만 커져 비판하던 시각은 피로로 완만하게 부드러워졌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낼 수 있는 월세를 벌어오는 것이 감사한 일상이었다.
요리는 정말 근접 불가의 영역이었다. 거기다 육체노동까지 하니 집안 반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목회하는 남편은 나와 비교해 시간이 여유로워서 자연스레 아이들 돌보는 일을 맡았다. 운동하는 아들은 학교 일과가 마치고 나면 이곳저곳 매번 바뀌는 경기장에 데려다주고 아이들과 저녁을 챙겨 먹였다. 일에 지쳐 반찬도 제대로 못 만들 때가 많았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려면 반찬을 사 와야 했다. 이런저런 수고에 남편도 지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등 근육에 분노가 배어있다. 그 시적 뒷모습에도 분노를 담을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감히 다녀왔노라 인사를 건넬 용기도 갖지 못했다. 미안함도 있었고 야속함도 있었다. 나도 놀고 온 게 아닌데 나도 고생하고 왔는데 나는 죄인이었다. 반찬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무능력한 주부였다. 우린 서로 위로를 건넬 힘이 없었다. 생존이 급선무였다. 감정은 적절히 접어둔 채 건드리면 안 되는 상자 속 미지의 것으로 두는 것이 나았다. 꺼내면 서로를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2006년 미국에 온 이후로 나에겐 지나가는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삶을 살았다. 시냇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매월 내야 하는 월세는 내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내가 가진 돈을 강탈하는 강도 같았다. 아무리 일의 날짜를 늘려도 내 수중엔 돈이 없었다. 남편은 암묵적으로 내가 일을 더 하길 원했다. 일을 더 하느라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그것 때문에 불편했다. 답이 없었고, 출구가 없는 삶 같았다.
미국 땅에 삶을 꾸린 지 17년이 지났다. 미국에 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미국의 삶이 떠올랐다. 한 장의 그림처럼 내 모습이 보였다. 뿌리를 내리지 않아 들뜬 마른나무였다.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이유를 찾으며 변명했다. 내 내면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습관처럼 오늘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글을 쓴다는 건 마주하기 싫은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힘들지만 나와 대면했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이 땅에 발을 붙여보자고 조심스레 나 자신을 설득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늘 내 삶을 사랑하기로 했다. 감사한 하루를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