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 그리고 또막달, 슬픈 조선의
여인(1-2)

꿈을 심어준 내 할머니

by 소명작가


송 막달.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그녀의 이름은 슬픈 조선 여인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딸이 태어나 더 이상 딸이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 하나만 담긴 이름 송 막달. 송 씨 가문의 마지막 딸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 여동생의 이름은 송 또막달이었다. 이 또한 그녀가 가문의 마지막 딸이기를 바라는 이름이었고 딸이 그만 태어나기를 바라는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름이었다.


그녀가 박정용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으니 어디를 가도 기죽을 일이 없었다. 시대의 격동 일본 주권침탈과 민족 전쟁 6, 25가 지나갔다. 하지만 국토 남단 끝자락 작은 어촌 마을이던 그녀의 고향에서는 역사의 회오리가 그다지 그 마을 깊이 휩쓸지는 못했고 마을은 언제나 평온했다. 다만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넉넉해질 수 없는 한겨울 끼니는 걱정해야 하는 가난은 있었다.


그래서 막내를 제외한 다른 자녀들은 그 당시 국민학교라 불리던 의무교육 외에 다른 교육을 시킬 여유는 없었다. 농사의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유독 인물이 훤칠하던 셋째 아들은 멋만 부렸지 집안일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형의 아내가 결혼해서 그 집에 함께 살았다. 형이 입던 바지를 기워 시동생을 입힐라치면 그 바지를 보란 듯 눈앞에서 찢어버리고 새 바지 내놓으라 생떼를 쓰던 소년. 폼 나던 옷을 좋아하던 셋째 아들이었다. 타고난 좋은 인물에 거기다 까다로워 제멋대로여서 다루기도 힘들었던 내 아버지를 낳은 나의 소중한 할머니.


홀로 남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도 할머니 환갑 무렵이었을 게다. 혼자 빈 집에 남은 할머니를 위해 엄마는 주말에 나와 남동생을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남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토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할머니 마을 정류장에 도착하면 언제나 먼저 정류장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 토요일이면 할머니가 언제부터 정류장에서 우리를 기다리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때는 토요일도 학교에 등교를 했을 때이니 학교 마치고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면 오후 3-4시경 할머니 집에 도착했었다. 아마도 점심을 드시고 나면 그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앉아 계셨을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할머니 댁과 가까이 살았다. 6. 25 때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시는 큰 할머니 댁으로 양자를 간 아버지 동생이었다. 그 집에는 내 동생이랑 나이가 같은 사촌 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있었다. 낮에는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으며 놀았다. 밤이 되면 할머니 옆에 누웠다. 내 평생 팔베개를 하고 내 이야기에 반응을 해주고 내가 해달라는 걸 해 사람은 할머니 한 분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힌 기억도 유일하게 할머니 등의 기억만 있다. 나의 존재가 이 땅에 있음에 온몸으로 반응해 준 유일한 할머니.


“할머니 옛날얘기 하나 해 줘.”

“옛날이야기 그래. 가만있어 보자. 너 태어나고 한 달이 되었을 때 새벽에 아빠가 너를 안고 우리 집에 왔었다. 엄마랑 더는 못 살겠다고 했다. 너 이 집에 두고 갔다. ”

“그리고 할머니, 엄마는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됐어?”

“뒷날 너 찾으러 왔더라.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너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

”엄마 아빠가 자주 싸웠다.”


난 그 이야기가 늘 무서웠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에 괜한 서러움과 두려움에 엉켜 눈물을 흘리는 나를 위해 두 나무 선반 위에 있던 장롱에서 알사탕 하나를 꺼내셨다. 그리고 먹으라고 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입에는 사탕이 있었고 따스하게 나를 품은 할머니가 내 곁에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금기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 늘 모든 걸 허용하고 품어주셨다. 밤에 사탕을 입에 물고 잠들어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내게 너무 많은 금기를 말하던 엄마와는 정반대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사탕만큼이나 달콤하고 할머니 품만큼 따뜻했다.


내가 태어난 건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 말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이었다. 한 달쯤 지나서였다니 1월 말 엄청 추운 날이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싸우고는 아빠가 나를 안고 한참을 걸어 시골 마을 집에 나를 두고 갔단다. 더 이상 엄마랑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 싸움은 늘 물로 칼 베는 싸움이었다. 왜냐면 엄마 아빠는 몇 번의 이혼 위기까지 간 적은 있지만 이혼은 안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사건 후 5개월 뒤 두 분의 혼인 신고와 내 출생 신고를 같이했다. 아버지는 살면서 가끔 내게 말을 했다.


“내가 엄마랑 안 살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예뻐서 그냥 엄마랑 살기로 했다. 너 없었으면 벌써 이혼했을 거다.”

엄마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했다. 혼인 신고와 너의 출생 신고를 같이했다고

할머니는 나의 이야기 말고도 할머니의 고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할머니 왜 담배를 피워? 담배 끊어. 오래 못 산다고 하잖아. “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건 큰아빠를 군대 보내놓고 애가 타서 배운 거다. 지금은 못 끊는다.”


할머니는 언제나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하지만 할머니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난 적은 없었다. 할머니 품에 안기고 업혀도 담배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 선물은 언제나 담배였다. 철이 들고 아니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가는 내내 내 손에는 할머니를 위한 담배가 들려 있었다.


어린 시절 내게 눈을 맞추고 업어주고 품에 안아 재워주시던 할머니


결혼 후 티격태격 싸우시던 부모님은 혼인 신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또 남동생을 낳았다. 4남매였다. 난 한 번도 엄마 품에 안긴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는 게 당연했다. 15개월 터울의 금쪽같은 남동생이 태어났으니 내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불안했던 결혼 생활에 안정이라는 종지부를 찍게 해 준 남동생 그 남동생에 비해 아장아장 걷는 나는 엄마 눈에 다 큰 아이였다. 내게는 늘 다 큰 게 왜 저래라는 악다구니 말만 귀에 꽂혔다.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는 따스한 사람의 품은 우리 할머니다. 나를 혼내지 않고 내가 뭘 말해도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리듯 벽장문을 꺼내 간식을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 내 눈을 맞추고 내가 묻는 말에 조곤조곤 말을 건네주시고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 품이 따스했다는 걸 이제야 기억해 냈구나.


나를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해 주던 나의 가장 중요한 타인, 송 막달 할머니. 할머니 당신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따스했습니다. 내가 이야기의 씨앗을 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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