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조직의 장식품이 되긴 싫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온 어느 중년이 다음날 동창회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어제 몇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가보니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하다. 어눌한 실수가 폭죽처럼 터져 오랜만에 맘껏 웃어, 매우 즐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쓴소리 좀 해야겠다.
왜 그리 돈 자랑, 명품 자랑, 명예 자랑, 자식 자랑 못해서 안달이냐? 이런 게 싫어서 동창회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해 보았는지....
또 늦게 오거나, 빨리 가는 사람에게 왜 그리 핀잔을 주는지…….
“왜 이렇게 빨리 가니. 나는 낼 직장 안 나가고, 집에 갈 가정 없냐!”
50살이 된 우리는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부인이며, 며느리이며, 학부모이며, 직장의 사원이다. 학창 시절에는 똑같은 조건이었지만, 이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창들 중에는 실업자도 있고 사장도 있다. 벌이가 넉넉지 않아 회비 2만 원이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배려와 넓은 스펙트럼이 필요하다.
일찍 가는 사람일수록 어렵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임 시간을 넓게 잡고, 오는 사람 반갑게 맞이하고, 일찍 가는 사람은 더 반갑게 배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양성을 배려하지 않으면 이른바 잘 나가는 몇몇 강성이 주도하는 배부른 주당들의 놀이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과도한 술판이다.
우리 나이 때는 대학이나 직장에서 술과 담배를 강요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우리는 40년 전을 사는 게 아니다. 현대를 살고 있다. 각자 주량껏 마시고 담배는 흡연구역에서 피우는 게 당연하다. 왜 동창이란 사실만으로 뿌연 담배연기와 술 강요가 미덕이 돼야 하는지…….
나는 동창 모임을 1,2차로 나누는 것이 어떤가 제안해본다.
* 1차: 술은 자제하고 식사 위주로 9시나 10시까지 일찍 들어갈 사람 먼저 환영해서 들여보낸다. 이 시간에 주요 안건이나 공지사항 전달은 끝내자.
* 2차: 1차 이후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의 본격적인 여흥시간이다. 음주가무에 배고팠던 사람들은 신들린 듯 놀면 된다.
회비는 1차, 2차를 따로 걷자. 식사 1차만 하면 넉넉잡아 2만 원이면 된다. 그러나 술값이나 노래방 비용은 밥값보다 곱절이다. 1,2차 구분이 없으면 술 안 먹는 사람이 술 먹는 사람들 술 받아주는 꼴이 된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이익되는 모임이 돼서는 안 된다.
또 왜 그렇게 회칙은 좋아하는지…….
왜 명부 만들어 출석 체크하고, 임원 뽑고, 규율 만들고, 회비 내고 조직으로 옭아매려 그러냐. 회비 걷는 일은 그날 모인 사람들이 그날 지불하는 것으로 끝내야지, 안 나온 사람들까지 주머니 털어서 기금을 쌓아둘 생각은 말자. 불참금이 누적이 되면 안 나오는 동창들이 더욱 늘어날 것 아니겠니.
동창모임은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아야 한다. 평소엔 가정, 직장 등에서 조직의 의무를 지고 말처럼 채찍질당하며 달리다가 잠시 긴장을 풀고 활기를 충전하는 곳이다.
난 동호회 모임이란 만난 그날 모임에서 회장이고 총무이고 회원이고 규율이 결정되며, 그날 모임을 마치는 순간 홀가분하게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오히려 홀가분하게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동창은 순수한 우리의 동심을 충전하는 훌륭한 영적 정화 기능이 있다. 의무가 되는 순간 그 숭고한 가치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이 만나야 하는데, 동창회 조직의 장식품이 되긴 싫다. 자유로우면서도 배려하고 공존할 수 있는 성숙한 자율인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