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들을 온전히 지키는 방법

by 서산

책임질 것이 없는 삶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지만 아이를 갖고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무장해제돼서 주저앉아 손등을 내밀지만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죠. 여자친구와 만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같이 산지도 오래됐지만, 결혼하면 늘어날 책임감에 대해 서로 얘기하며 결혼 날짜를 잡지 않습니다. 이미 결혼한 것처럼 살고 있다는 것도 큽니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언가 완벽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결국엔 완벽한 준비를 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다다라서 도망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임질 것이 없어서 쉽게 도망치고, 제멋대로 살고, 굳이 현실과 부딪히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나뭇가지보단 갈대와 같아서 무거운 것이 올라오면 버티지 않고, 능글맞게 스르륵 바닥에 내려보냅니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고 비가 오면 축 처지기도 하죠. 버티며 부러지는 것보단 휘면서 살아남는 것에 익숙합니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이 생기면 미련 없이 직장을 관두고, 안 맞는 사람을 만나면 미련 없이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선을 그었습니다. 고백하자면 미련 없이 직장을 관두지 못하고, 안 맞는 사람을 계속 만나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힘들다면서 왜 버티는 걸까, 왜 버티다가 부러지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식사를 하면 단골메뉴는 아빠의 직장생활 얘기입니다. 아빠는 올해로 33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고 계십니다. 2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퇴직을 하게 되죠. 대퇴사시 대라 불리는 요즘에 33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는 얘기는 낯섦 그 자체입니다. 5년만 다녀도 오래 다녔다는 얘기를 듣는데 33년이라니. 아빠는 직장생활 얘기는 고생했다는 엄마의 얘기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아빠의 직장생활 오래 했다는 얘기를 스무 번쯤 들었을까요, 문득 부모님이 가정을 책임지며 버텼기 때문에 지금 내가 책임질 것 없이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이라는 것을 짊어지고서 물적으로 심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죠.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오랫동안 30년이 넘는 세월을 탁구 코치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비싼 학원비와 재료를, 코딩을 배우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비싼 코딩 학원비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언제든 무슨 일이 있으면 집에 오면 된다는 말을 하시는데, 이것이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멋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책임을 멀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부모님이 자식들과 가정을 지키듯,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그게 참 멋있는 것이고요.



누군가 저에게 꿈꾸는 삶에 대해 물어보면 이미 이뤘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꿈꾸는 삶이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오래 꾸면서 조금씩 나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것을 베풀 수 있고, 조금 더 좋은 공간에서 살 수 있고, 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면 좋겠는 그런 것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저도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되돌아보면 저는 책임지는 누군가의 그늘에 서서 편안하게 다양한 방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책임을 지고 버티는 사람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정작 책임지고 버티는 사람 때문에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죠. 시간이 흐르면서 책임지고 싶은 게 많아지는 요즘, 소중한 것들을 온전히 지켜내는 책임 있는 삶을 살 것이라 다짐합니다.


언제든 무슨 일이 있으면 집에 오면 된다는, 연락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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