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 언제일까요. 저는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로 한 달간 이용 불가합니다" 라는 두꺼운 검은색 글자로 쓰인 문장을 봤을 때였습니다. "계단으로 좀 걸어 다니면 어때, 건강에 좋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습니다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집이 18층이었기 때문이죠. 계단수를 세어보니 층당 24개여서 매일 864개의 계단을 밟아야 했습니다.
시험 삼아 한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내려갔다 올라왔습니다. 10층이 넘어가면서 숨이 조금씩 가빠졌지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힘을 냈습니다. 언제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더라고요.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을 하고 몇 주 뒤 대망의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18층을 오르내리는 건 그날의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날에는 한숨을 푹푹 쉬며 정말 힘들게 계단을 올랐고 기분이 좋거나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날에는 쉽게 쉽게 오르내렸습니다. 일주일쯤 지나면서는 안타깝게도 점점 한숨을 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원망어린 눈빛으로 엘리베이터 층을 보여주는 스크린을 바라보면 블랙홀처럼 까마득한 검은색만이 가득했습니다. 옆동 가족은 한 달간 묵을 숙소를 구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저 부러워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날은 계단을 오르는데 아저씨 한분이 인사를 건넵니다. 쭈뼛대며 “안녕하세요” 하고 어색한 인사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계단은 인사를 주고받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었죠. 아파트에 산지 몇 년이 지났는데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움직이는 분들은 얼굴이 익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었는데 아예 의자에 앉아서 계속 인사를 건네며 웃으시는 할머니도 계셨죠. 좁은 계단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 피하며 인사를 하는 것은 재밌기도 했고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인사를 건네며 10층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습니다. 한 주민분이 밖을 한참 동안 보고 계셨습니다. 밖에 뭐가 있는 건지 궁금해져서 고개를 내밀자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평온하게 날고 있었습니다. 창문 가까이로 가서 시선을 아래로 떨구면 붉은색 단풍이 펼쳐져 있더라고요. 잠시 서서 풍경을 바라보니 거칠게 내쉬던 숨소리가 잠잠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옆에 서서 밖을 같이 바라보던 주민분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층층마다 보이는 풍경을 기대하며 계단을 올랐습니다.
인사와 파란 하늘 속 구름을 바라보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한 달이 흘렀고 엘리베이터의 스크린에 흰색 글씨로 숫자가 나타났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황금빛이 반짝이는 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계단을 이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때의 기분 좋음을 느끼기 위해 종종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운동도 되고 좋더라고요. 아쉽게도 주민분들과 마주치며 인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계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창밖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저는 고맙게도 창밖의 아름다움을 보는 분을 만났고, 잠시 멈춰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배웠습니다. 같은 곳에 있어도 어디를 보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문득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계단만 바라보고 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곤 억지로라도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려 합니다. 혼자 고개를 들기 힘들때면 같이 볼 누군가를 발견하려 애쓰기도 합니다.
계단에 서있던 주민분의 이름은 모릅니다만 평온하게 밖을 바라보던 그 표정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