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가기 위해 광화문 골목길을 바삐 걷는데 회사원들이 사원증 목걸이를 걸고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싱그럽고 활기차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 전해온다. 나의 한때의 시절이 오버랩 된다. 어떤 화려한 목걸이나 액세서리보다 당당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네모반듯한 사원증. 몇 날 며칠 소설을 쓰듯 자소서를 써 지원해도 쓰디쓴 낙방만 맛보는 사람들은 회사원들의 가슴에 훈장처럼 빛나는 사원증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들까?
고층 건물이 밀집한 도심의 풍경은 건축 기술에 놀랐다가도 여유를 찾아보긴 힘들고 빌딩의 그림자마저 서늘하고 치열한 경쟁의 그늘로 비춰진다. 조직 관계에서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매끄럽지 못할 때 상사나 동료들이 주는 스트레스는 가슴을 옥죌 것이다. 풀리지 않는 화와 불안감은 네모난 칸칸의 사무실과 창문과 탁자와 좁은 책상과 엘리베이터와 회의장을 떠돌며 무거운 기운으로 맴돌지도 모른다. 네모반듯한 빌딩을 탈출해 동료들과 식사하며 하하 호호 소탈하게 웃는 발걸음은 한여름의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달콤한 탈출구일 것이다.
예약된 식당에 가느라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마스크를 두고 나왔다가 되돌아갔다 오느라고 조금 늦는다는 옛 직장 동료의 카톡 알림이었다. 자주 다녀서 익숙한 곳은 지리와 교통편을 훤히 알아서 검색해 볼 필요도 없이 자신 있게 나서지만, 낯선 곳에 약속 장소가 정해지면 네모난 휴대폰으로 지름길을 먼저 검색한다. 가장 빠른 코스를 검색해서 따라가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 헤매는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유용하게 쓰인다.
모임에서 퇴직한 직장 선배도 만났다. 퇴직한 후 표정은 부드러워졌다. 산에도 자주 가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기타도 배우고 여유롭게 시간을 다 누리는 듯해도 일을 놓은 자의 쓸쓸함과 미래의 불안감이 왠지 어깨 한쪽에 앉아있는 듯 느껴진다. 그분은 내게 고백했다
“만 65세가 되어서 지하철이 공짜라 ‘지공거사’의 권리를 누리지만 한편으론 65세 이전에는 교통카드를 대면 ‘삑~’ 하고 한번 소리 났던 것이 ‘어르신 교통카드’를 대면 두 번 ‘삑삑~’ 하고 나는 소리가 묘한 감정을 준다고 했다. 그가 보여주는 교통카드에는 왠지 모를 나이 들어감의 쓸쓸함이 네모 한구석에 담겨있는 듯했다. 여운이 오래갔다.
매일 아침 하루가 시작되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 팩에서 우유를 한 컵 따라 마시고 토스트를 구워 버터를 발라 먹는다. 병원이라도 다녀온 날이면 네모난 약봉지를 잘라 약을 먹는다. 현관문을 열고 네모난 신문을 들여와 핫이슈를 따라 읽어나간다. 식사를 마치면 흡인력이 강한 청소기의 네모난 헤드로 거실부터 구석구석 청소해나간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열어보고 빼곡한 네모난 방들을 열어보고 일들을 처리한다.
어디론가 이동할 때 지하철을 이용할 때면 객차 안에서 선풍기 커버, 장갑, 마스크, 만능 공구 등 잡다한 잡동사니를 팔면서 호객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가슴 한가운데에 어르신 교통카드를 목걸이 줄에 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는 경쾌하고 당당함보다는 힘겨움과 서러움이 전해진다. 좀 편히 쉬면서 사셔도 될 나이에 생계를 위해 차갑고 험한 세상 일선에 나선 사람들인 것 같아 보여 마음 한구석에 연민이 생기곤 한다.
네모는 사람들의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신분이자 보증의 플라스틱 카드도 되었다가 고뇌하며 정답을 하나씩 고르고 써나가는 네모의 시험지에는 사람의 앞날이 담겨있다. 봄이면 논물이 찰랑이는 논에 가득 채울 새싹 모종이 모판에 가지런히 심어져 희망을 불러오고 학생들 급식판에는 즐거움과 맛이 담겨있다. 그런가 하면 애경사를 치르고 큰 금액을 계산할 때 지폐를 준비해 가지 않아도 간단하게 신용카드 한 장이면 해결된다.
네모난 보도블록 위를 경쾌하게 걸어가는 회사원들이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발걸음이 좋다. 한편 지하철역에서 오는 차를 무심히 기다리는 노인의 목에 걸린 어르신 교통카드는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무기력감을 준다.
인생은 어차피 네모에서 시작해서 네모를 서성이다 네모로 끝나는 게 아닐까.
산모가 침대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는 자라며 네모난 가족관계증명서에 등재되고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돈이 필요할 땐 현금 자동출금기 앞에서 카드를 넣고 네모 위에 있는 숫자를 눌러서 생활에 필요한 현금을 지폐로 찾는다. 우리는 네모난 빈 도화지에 각자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의 생을 살아간다. 생이 다하는 날 우리는 네모난 틀에 불로 태워져 한 줌 재가 되어 납골당에 안치되거나 네모난 관에 고이 모셔서 영원한 잠을 잔다.
가을 햇살이 발코니 큰 틀의 사각 창문 너머 거실 깊숙이 들어온다. 아파트 단지의 단풍나무들이 곱게 물들었다가 하나, 둘 옷을 벗으며 어디론가 만추의 먼 길을 떠나듯 가벼운 몸으로 돌아간다. 소파에 앉아 오래된 메모 수첩을 들춰보다가 오래된 앨범도 들춰보며 옛 추억에 빠져든다. 색이 바랜 사진마다 과거 한때의 삶이 녹아있다. 거실에 걸린 네모벽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오후를 향해 째깍째깍 쉼 없이 돈다.
그래, 인생은 네모에서 시작해서 네모를 맴돌다 다시 네모로 끝나는 거지.
빛나던 사원증도 어르신 교통카드도 얼마 동안의 유효기한이 있을 뿐이다
‘네모...네모..네모. 모네’의 수련이 매일 아침 새롭게 눈 비비며 깨어나듯 네모 안에 한 생의 꿈이 피었다 진다.
그것은 인생, 네모...세라비(C’est la vi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