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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월 Aug 04. 2023

눈 오는 날의 기호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야 안 쓸 것으로 판단하면 바로 버리면 된다지만, 방하착(放下着)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난데없이 계산기가 떠오르며 더하기 빼기 부호가 또렷하게 다가왔다. 눈은 그리움을 더해준다. 송이송이 그리운 이의 얼굴이 떠오르며 어디 먼 데서 소식이 오려나 싶어 휴대폰을 자꾸 쳐다보게 한다. 한편 눈은 뺄셈을 가르친다. 무겁고 힘든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속삭이듯 내린다.

 눈은 가진 건 없어도 낭만을 찾는 철부지 시인 머리 위에도 죄지은 자 어깨 위에도 평등하게 내린다. 지친 어깨를 어루만지고 잠시 눈을 감고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자신감의 덧셈과 근심을 내려놓는 뺄셈을 가르친다. 터진 목화솜 이불에서 솜이 흩날리듯 함박눈 속에서 더하기 빼기 더하기 빼기 부호를 날리며 눈이 내린다. 눈(雪)은 더하기(+) 빼기(-) 혹은 곱하기(x) 나누기(÷) 기호로 반짝이며 연산기호처럼 내린다.

 해 질 녘에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우리 주변은 어디를 봐도 기호들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닌가. 노송이 불평 한마디 없이 머리에 쌓인 눈을 이고 수행하듯 맨발로 서 있고 가로등은 긴 목을 빼고 누군가를 위해 어둠을 밝히며 서 있다. 잠시 소나무에 앉았던 어미 직박구리가 날갯짓하며 가지를 떠난다. 둥지에 두고 온 어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찾으러 가는 건지 흐린 허공을 힘차게 박차고 나는 모습이 잿빛 하늘을 가르며 멀어진다. 멀리 보이는 교회 첨탑에 십자가가 반짝인다. 빨간 불빛이 가슴에 빠른 속도로 파고들다 하늘로 퍼진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구원자 같은 불빛에 칭칭 감기고 싶어진다. 눈 오는 날엔 풍경이 또렷한 기호로 다가온다.

 오랜만에 함박눈 내리는 풍경 앞에 서서 얼어붙은 듯 망연히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눈을 둥글게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부서진 나뭇가지로 눈썹과 코를 만들고 산수유 열매를 따서 눈을 만들고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 눈사람에게 씌웠다. 눈사람과 나란히 옆에 서 있으니 철없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때 친구들과 누비던 골목과 어쩌다 먹던 쫀드기와 친구 얼굴이 함박눈처럼 눈꽃처럼 하나씩 피어난다. 

눈사람이 소리 없이 묵언으로 말을 건넨다. 잠시 숨을 돌리고 순수(純粹)의 시대로 돌아가라고

“나 돌아갈래, 나 다시 돌아갈래 ” 영화 ‘박하사탕’ 대사가 귓전에 부서진다. 

함박눈의 포로가 된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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