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6H, B, 2B, 3B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하는 기쁨과, 한편 마음이 숨통을 트는 힐링의 시간은 보너스처럼 주어진다. 스케치도 너무 잘하려고 여백 없이 다 채워나가면 답답하고 은은한 멋이 없다.
그림을 다 완성한 다음 칠판 앞에 나란히 세워놓고 품평회를 하는 시간이 재밌다. 그 사람의 개성이 묻어난다. 섬세하지만 선이 약하고 잔잔한 그림, 다소 거칠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림. 같은 그림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얼굴이 둥근 사람, 갸름한 사람 헤어스타일만 부풀려 빵처럼 커진 사람
아무렴 어떠랴. 각자 제맛이 정답인걸. 그리는 동안 행복하고 하하 호호 웃고 공감하는 시간이 재밌어서 수업이 끝나면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 스케치북 한 권이 손때가 묻으며 어느새 채워져 나간다. 용감한 도전이었고 진전이 느껴져서 좋다.
내게 ‘시인화가님’이라고 동인들이 부른다. 기분이 썩 괜찮다. 이름에 걸맞게 실력을 키워야 할 텐데 포기만 하지 않으면 차츰 좋아지리라는 신념으로 버틴다. 미지의 영역을 접해보니 쉬운 건 없다. 시간을 투자하는 노력밖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있듯 늦은 시기란 없다. ‘오늘이 내 인생 최후의 날이다’ 생각하고 오늘을 오로지 충만하게 즐기고 싶다.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고 바로 시작하면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가 열린다.
나이 들수록 행복이라는 개념이 어떤 큰 목표를 세우고 성취에서 맛보는 젊은 날의 행복지수와는 다르게 목표는 작아도 과정에 충실하며 맛보는 ‘소확행’의 소소한 기쁨이 좋다. 동인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쓸쓸한 감정과 외로움도 줄어든다.
염천(炎天) 한가운데 하얀 도화지와 맞서며 우뚝 서기 위해 연필심을 종류별로 1cm 길이로 뾰족하게 깎는다. 연필통에 12자루를 가지런히 일렬횡대로 담는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는 장난감 병사가 작은 총을 겨냥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