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오늘따라 비가 올까. 그것도 여우비도 아닌 굵은 장대비라니...
오월 들어 며칠 전에 딸내미가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조용필 & 위대한 탄생 50주년 기념 콘서트’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평소에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도 선뜻 내지갑을 열기엔 티켓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터다. 라이브 공연을 좋아하는 내 맘을 어찌 알았는지 딸내미가 1년에 한두 번은 라이브 공연 티켓을 내민다.
오늘 공연장은 실내가 아닌 잠실 야외 주경기장 주 무대다. 궂은비에 대비해서 타월과 휴지, 쿠키, 사탕, 물 1병 등을 챙기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서 내려서 공연장으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였다. 고만고만한 가족들, 서너 명씩 모인 친구들이 삼삼오오 빗속을 뚫고 행사장으로 가는 줄이 빗속에 장엄하다. 그 근처 편의점도 줄이 길다. 음료수 등을 챙기는 인파로 북적였고 화장실도 겹겹이 긴 뱀처럼 줄이 길다.
행사장 주변의 상술에 넘어가지 않고 무심코 가려고 했지만 야광 스틱을 파는 유혹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즐기자. 망설임 없이 야광 스틱 1개를 샀다. 잠실 스타디움 주변은 비가 오는 와중에도 치킨과 맥주, 김밥 등 틈새로 하나라도 더 팔고 사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다. 빗속을 뚜벅뚜벅 걸어가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리 자리는 스타디움 돔에서 떨어진 자리여서 비를 피하기 힘들었다. 주 무대에서 제일 가까운 잔디구장 석은 제일 비싼 자리일 텐데 비를 온전히 맞아야 하는 나쁜 자리고 전락하고 말았다. 자리가 가격 대비 역전된 셈이다. 돔 바로 밑 3층에 조금 싼값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우비 쓸 일도 없이 여유롭게 관람할 태세로 앉아있다. 이런 걸 바로 역전이라고 하는 거겠지. 인생에도 크고 작은 역전을 겪으며 살아가듯.
경기장에 앉았는데 뒤에 앉은 관람객을 고려해서 우산을 쓰기는 미안했다. 가져간 우산은 바닥에 내려놓고 우비만 쓰고 앉아있는데 모자에서 비가 계속 주르륵 이마로 떨어져 내린다. 아예 젖을 각오를 하고 비는 잊기로 했다.
드디어 가왕 조용필이 등장했다. 흰 슈트에 검은색 선글라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전자 음이 허공을 쥐어뜯듯 전주곡이 흐른다. ‘단발머리’가 흐르고 ‘고추잠자리’가 날 듯 선율이 흐른다. 큰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야광 스틱을 흔들며 몰입하며 환호했다. 객석 관람객들이 일시에 흔드는 야광 스틱이 반짝반짝 반딧불 축체장 같고, 야광이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며 물결을 이룬다. 열광으로 몰입하는 모습이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내 뒤에 앉은 중년 부인은 조용필이 잠시 노래하다 숨고를 사이에 “오빠~~사랑해~~용필오빠 ~알러뷰~~!!!” 라고 거침없이 외쳐댄다.
웃음이 나오다가 한편 열혈 팬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60~70년대를 함께 살아온 세월, 용필 오빠가 그리운 건지, 관람객 각자에게는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건지, 50은 훨씬 넘어 뵈는 중년 팬들의 아우성이 빗소리를 뚫고 잠실벌을 가른다.
‘모나리자’, ‘그 겨울의 찻집’이 밴드 음을 타고 흐르고 가왕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마치 20대처럼 ‘바운스’를 경쾌하게 부른다.
발라드 특유의 톡톡 튀는 전주곡이 귀에 감기고 빗방울도 튀어서 바닥에서 바운스 된다. 묘한 일체감이 든다. 내 마음속의 낭만적 달콤한 감정들이 튀어나와 빗방울과 음악과 섞여 마구 심장에서 바운스 되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 그리운 얼굴들이 튀어나왔다간 사라지길 몇 번인지···. 순전히 음악 때문이었다.
음악의 힘이라니. 우리는 폭우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대중음악의 힘은 위대했다.
좌석을 떠날 수 없는 흡인력. 특수무대가 주 무대에서 몇 번이고 좌우· 상하로 움직이고 가왕은 일일이 팬들을 위해 손을 흔들고 환호에 답하고 4만 5천여 명의 관객과 일체감으로 하나가 되었다. 가왕이 한 소절 부르고 마이크를 객석으로 내밀면 객석은 누구랄 것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 떼 창을 하곤 했다. 특수 음향 장치 덕분에 내가 앉은자리 바로 옆 스피커에서 음악이 심장을 흔들며 볼륨감 있게 퍼진다.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빗 사이로 허공에 폭죽이 터지고 음악이 퍼지고 관객의 함성에 열정의 도가니는 최고조에 달한다.
현장에서 느껴보니 역시 조용필은 가왕이라는 칭호가 잘 어울렸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 내내 30여 곡을 소화시켰다. 주옥같은 노랫말 가사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가사에 얽힌 나의 극히 개인적인 과거도 불쑥 불쑥 함께 울다 웃는다.
‘한오백년’을 부를 때는 한풀이처럼 구슬퍼졌다가 ‘여행을 떠나요’를 따라 부를 때는 경쾌했다가 잠시 단발머리 소녀가 됐다가, 그 겨울의 찻집의 주인공처럼 쓸쓸해졌다.
공연을 즐기며 제일 가슴에 와 닿았던 노래는 ‘바운스’였다. 공이 튀기듯 바운스, 바운스, 바운스 ... 명랑 하가다 빗소리에 빗방울이 바운스 되었다가 나의 추억도 함께 바운스, 바운스 굴절되었다 튀어오른다.
조용필 기념 콘서트는 폭우도 막지 못했다. 공연이 끝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경기장을 걸어 나오는 인파 속에 나도 한 점이 되었다. 과거의 한때 그때를 맴돌다 불빛에 바운스 되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비 오는 밤이라 별은 빛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눈망울이 별처럼 반짝이며 한때의 정점을 향해 바운스, 바운스. 심쿵 하는 눈빛으로 반짝였다. 근심 걱정으로 놀란 가슴 말고 순수하게 내 심장이 명랑하게 뛰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바운스, 바운스, 바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