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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월 Aug 04. 2023

그늘

  간이역에 앉아 내 인생의 가을을 만났다. 꽃그늘은 꿈처럼 언제 스쳐갔는지 가물가물하고 그늘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무 그늘은 아니어도 간이역은 헛헛한 인생길에 초록 그늘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고 환호하듯.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아 지독한 쓸쓸함이 몰려올 때 인기척만 들어도 그대인 듯 반갑고 불쑥 말을 건네고픈 공간. 시간이 멈춘듯하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곳. 웅장한 건물은 아니어도 내 앉을 의자 하나 있으면 족한 곳.

 땡볕에 걷다 지쳤을 때 간이역에 앉아 다음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태양의 열기를 식혀주는 쉼터가 있어서 좋고, 빠른 열차 행렬 사이로 시간이 멈추듯 느린 열차들이 멈칫멈칫 다가서는 간이역이 좋다. 여름뿐이랴, 한겨울 칼바람에 흔들리며 걷다가 간이역에 들어섰을 때의 그 따뜻한 충만함이라니. 이기적이고 완벽한 사람보다는 간이역 같은 사람이 좋다. 그늘처럼 나의 배경이 돼 줄 그런 사람이 좋고, 상상 속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좋다.

 간이역은 빛과 어둠, 더위와 추위의 중간을 닮았다. 가로수를 따라 걷거나 숲길을 걸을 때 그늘은 시원함과 편안함을 준다.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쉽게 지치는 것을 막아주고 오래 걸을 수 있는 힘을 준다.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그늘의 음영이 좋다. 

 그늘 아래를 걷다가 일렬로 선 나무를 보다가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늘은 흰색과 검정의 중간 부분 환함과 어둠의 중간지점이다. 사람도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간혹 부러지는 사람은 유연성이 부족해서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우유부단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신념을 갖고 있으되 때로는 빈틈 사이로 타인의 의견을 포용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의 중간쯤 되는 그늘 같은 사람이 좋다. 

 그늘은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나 도심의 큰 느티나무 아래엔 사람들이 자주 모인다. 그 마을에 오래 산 터줏대감 노인들의 단골 쉼터다. 바둑판이나 장기판 내기가 벌어지기도 하고 술내기 게임이 벌어지는 곳도 그늘 아래서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 베적삼을 입고 한 손엔 부채를 들고 더위를 식히는 풍경은 익숙한 마을 풍경이다. 넉넉히 의자를 마련해놓고 담소를 나누거나 간식을 즐기는 사랑방이자 놀이 공간, 오가는 사람이 잠시 쉬었다가 소식을 접하는 참새 방앗간 같은 고마운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그늘은 운치가 있는 터에 유용하게 쓰일 때도 많다. 원색의 옷은 세탁해서 땡볕에 말리기보다는 그늘에 말려야 색이 변하지 않는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수박을 먹거나 더위를 식힐 때 마침 나뭇잎이 살랑거리면 녹색의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며 위안을 준다. 몸도 마음도 싱그럽다. 그늘에 심심하게 말린 무청이 먹거리를 주고 자연 바람이 솔솔 부는 바람 그늘은 선풍기나 에어컨의 기계 바람에 지친 심신을 편하게 해준다.

 봄이면 나그네는 꽃그늘 아래서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자신도 꽃처럼 피어나길 소망한다. 연인들은 팝콘처럼 핀 벚꽃 그늘 아래서 사랑을 고백한다. 햇볕을 가려주는 나무 그늘이나 건물이 가려주는 그늘도 좋고 직접 조명을 가려주는 은은한 그늘 같은 간접 조명은 직접 조명보다 눈 건강에도 좋다. 강렬한 전깃불은 눈에 피로감을 주고 얼굴의 잡티나 주근깨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나쁜 솔직함이 있다. 어릴 때 흥얼흥얼 자주 불렀던 <섬 집 아기>에 나오는 ‘섬 그늘’은 애잔함을 불러온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라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왠지 일이 잘 안 풀려 근심을 안고 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은 얼굴에 그늘이 있다고 한다. 강산이 몇 번 바뀔 나이를 살다 보면 어디 근심 한 둘 안고 살지 않는 사람 있을까 보냐. 상처가 있거나 아파봤던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면 동병상련 측은지심이 생기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한 사람이 추풍낙엽처럼 하루아침에 가는 경우를 주변이나 매스컴에서 접하곤 한다. 그런 사람은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위기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적당한 크기의 실패나 아픔은 몸과 정신 줄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강화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인상이나 옷차림이 지나치게 깔끔한 사람보다는 약간 틈새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좋다. 아무 말이나 걸어도 받아줄 것 같아서다. 성격도 아주 깐깐한 사람보다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농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여유롭고 푸근해 보여서 좋다.

 “오늘 누군가가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는 이유는 오래전에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미국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한 말이다. 하루아침에 되는 건 없다. 좋은 것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다. 나무 그늘 아래 걷다 보면 나뭇가지 같은 혹은 이파리 같은 얼굴들이 스쳐 간다. 당당한 우듬지로 우뚝 서서 그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쉼터가 될 수 있다면. 햇볕이 강하고 뜨거울수록 더욱 두터운 그늘이 되어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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