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지 싶다. 펜촉을 잉크에 찍어서 또박또박 영어 스펠링을 썼던 기억이. 대문자를 쓸 때는 요령 없이 딱딱하게 그대로 따라 썼고 소문자를 쓸 때는 약간 멋을 부려 흘려서 썼던 것 같다. 노트에 글자를 써나갈 때 사각사각하던 펜촉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장면과 소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검은색 잉크는 병뚜껑을 잘못 닫아서 하얀 교복에 묻거나 책가방에 흘러서 당황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후로는 쉽게 써지는 볼펜이나 플러스펜 같은 편리한 도구를 사용했다.
작가들이 책을 내고 펜 사인회를 할 때는 주로 만년필로 책에 정성껏 사인을 해준다. 왠지 일반 볼펜보다는 만년필로 직접 사인을 해주면 폼이 나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정성이 느껴지고 배려심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시내를 걷다가 좋은 만년필을 전시한 곳을 지날 땐 한 개 갖고 싶어도 가격이 비싸서 선뜻 사지지가 않는다. 눈요기에 그치기 일쑤였다.
지난겨울 내 생일에는 대학생인 아들이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선뜻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포장을 열어보니 만년필 세트였다. 수제 만년필과 보통 만년필 세트로 된 P사 만년필이었다. 용돈도 부족할 텐데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내게 선물한 만년필을 손에 잡고 한참을 만지작대며 좋아했다. 아까워서 자주 사용하지 않고 고이 펜 통에 모셔뒀다.
웬만하면 스마트폰에서 문자로 소통하고 글이나 문서도 컴퓨터 키보드에서 워드로 작성해서 주고받다 보니 실제로 펜을 쓸 일은 많지 않다. 어쩌다 한번 만년필을 꺼내 좋아하는 문구나 애송시를 따라 쓰거나 생각을 적어나가는 일이 있다. 하루는 만년필을 사용하려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써지지 않았다. 문구점에 가서 원인을 알아봤다. 잉크를 한번 개봉해서 만년필에 끼우면 사용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버린다고 했다. 아낀다고 사용한 잉크가 말라서 쓸 수가 없게 됐고 새 잉크를 사서 리필을 해야 했다. 순간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컴퓨터와 전자 기기를 아끼는 것은 어찌 보면 반드시 현명한 일은 아니다. 제때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겉모습은 멀쩡해도 수명이 다하면 써보지도 못하고 구 모델이 되고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할 때가 많다. 만년필도 아낄 일이 아니다. 잉크는 다 쓰면 바로바로 교체해주고 자주 사용했어야 했다.
거리를 지나다가 LP 판을 파는 음반 가게를 지날 때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깐 서는 버릇이 있다. 음반은 사지 않더라도 귀에 익숙한 올드 팝이 흐르면 추억에 잠긴 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선다. 플라스틱 볼펜을 주로 쓰다가 만년필을 손에 잡으면 손맛이 느껴진다. 철제로 된 뚜껑을 열 때 느껴지는 감각이 신선하고 남다르다.
한 번은 쿠바에 갔을 때 헤밍웨이 기념관에 갔다. 천천히 기념관을 둘러보는데 헤밍웨이가 썼던 수동 타자기와 사무용구들이 가지런히 책상 위에 있었다. 현대가 디지털 스피드 시대라지만 오래된 것들을 보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천천히 음미하는 아날로그가 좋아진다.
‘펜(Pen)’ 하면 잉크병 위에 꽂힌 깃대 달린 펜이 연상된다. ‘Pen’의 어원이 깃털의 의미를 지닌 영어나 라틴어의 ‘Penna’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깃털 달린 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유가 깊은 철학자가 스쳐가기도 있다. 소크라테스야 책을 한 권도 안 썼으니 어원이 어찌 되었든 펜을 사용했을 리야 없을 테고.
하얀 백지 위에 만년필을 들고 있으면 쓰기 전에 조금은 오래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쓸 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대로 생각하고 쓰게 된다. 컴퓨터에서 문서편집기를 사용해서 글을 쓰면 수정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정리된 개념 없이 아무렇게나 막 쓸 때가 많다. 펜으로 쓴 글은 잘못 쓰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되기 때문에 조심해서 쓰게 된다. 글을 망치면 잉크도 종이도 아까우니까.
샤프펜슬은 곧바로 사용하지만 연필을 사용할 때는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연필깎이로 깎는 동안 마음이 정리가 되고 집중이 된다. 마찬가지로 볼펜을 들었을 때보다는 만년필을 잡고 있으면 왠지 차분해지고 고요해지며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펜을 들면 아련한 옛 기억들이 잉크를 따라 흘러나오기도 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침착해지고 솔직해진다. 45도로 비스듬히 기울게 펜을 잡고 글을 쓰다 보면 나 자신도 머리 숙일 줄 모르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겸손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인지?
아들이 사준 만년필 덕분에 오랜 시간을 볼펜을 사용하다가 다시 제대로 된 펜을 잡았다. 잉크가 마르지 않도록 자주 써야겠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파란 잉크는 설렘이 있다. 어디 만년필뿐일까. 사람 사이의 관계도 자주 돌보지 않으면 굳은 잉크처럼 마르고 건조해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