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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월 Aug 04. 2023

바퀴

   바퀴는 그리움을 불러온다.

 바퀴는 오래전의 시간과 흔적, 장소와 풍경의 그리움을 부려놓는다. 탄천을 걷다 지칠 무렵 벤치에 앉았다. 배낭에 준비해 간 커피를 꺼내 마신다. 여유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친구와 손잡고 걷는 사람, 애완견과 대화하며 걷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걷는 이들, 헤드폰을 쓰고 생각에 잠긴 듯 고독한 듯 걷는 쓸쓸한 얼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자전거 바퀴 위에 상상만으로 동승한다. 

 아득한 옛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위를 완행버스가 지나고 장보따리를 가득 머리에 이고 오는 엄마의 모습을 바퀴는 흑백영화처럼 펼친다. 벼가 익어가는 논 옆길을 자전거에 짐을 올망졸망 가득 싣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도 스쳐간다. 걸음마를 막 배운 코흘리개 막냇동생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마당 안을 빙빙 돌다 소낙비를 맞고도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던 한여름도 떠오른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바퀴는 굴러야 존재 이유를 아는 듯 신명 나게 구른다. 폐차장에 수북이 쌓인 폐타이어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생명이 다한 목숨이다. 굴렁쇠를 굴리고 가는 어린이의 눈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오륜기의 로고도 바퀴 다섯 개가 맞물린 형상이다. 올림픽 로고를 자세히 보면 왼쪽으로부터 청색· 황색·흑색·녹색·적색의 순서로 다섯 개의 둥근 고리가 ‘W’자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서로 이웃하면서 하나인 지구촌 5대륙을 상징한다.

 바퀴는 구르고 시대는 변한다.

 가수 겸 시인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의 노래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라는 의미를 지닌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의 가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성급히 단언하지 말아라, 바퀴는 여전히 돌고 있고, 시대는 변하고 있으니··· ”

 1984년에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공개하면서 연설문에 노래 가사 일부를 예로 들어서 화제가 되었다. 바퀴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자 기회이다.

 바퀴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양병집과 김광석이 위 밥 딜런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가사엔 이런 내용이 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 나는 돛단배/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노랫말이지만 모순된 세상에 대한 유쾌한 풍자의 돌직구로 들을수록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바퀴는 굴러야 제맛이다. 세상도 돌고 돌아야 제맛이다.

 촘촘한 타이어 바큇살에는 이야기가 숨 쉰다.

 바퀴 중에서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전거 바퀴다. 장미가 툭툭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월이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다. 내가 힘들었을 때 보살펴주신 선생님이셨다. 죄송한 마음에 평소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추억 속의 고마운 선생님 얼굴이 머물다 간다. 

 바퀴는 기억을 호출한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로 기억한다. 하늘엔 만국기가 펄럭였고 운동장 행사 본부석 위에는 상품이 내 키만큼 쌓여 있었다. ‘상(賞)’이라고 푸른 글씨가 크게 찍힌 두툼한 공책 묶음이 탐이 났다. 달리기 시합에서 기필코 우승해서 공책을 갖고 싶었다. 달리기 시합이 시작됐다. 하필이면 내가 달리는 같은 조에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가 있을게 뭐람. 코너를 달리다가 넘어졌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그날 이후로 걸어서 통학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자전거 바퀴를 보면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바퀴는 뒤늦은 깨달음이다.

 우리 집은 신작로까지도 한참을 걸어 나와야 하는 산속에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무릎을 다쳐서 걷는 것도 힘들게 되자 댁에서 평소보다 더 빨리 출발해서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셨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선생님을 꼭 붙잡았다. 선생님은 달리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하셨다가 내 이름을 불러주시곤 했다.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무섭다가 삼촌처럼 정겹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 당시엔 선생님이니까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해주시는 줄만 알았다. 고마움이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인지 자식을 키우면서 뒤늦게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바퀴는 돌고 또 돈다.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황금 물감이 번지는 들판, 가을의 잔치에 동참해보자. 마음이 애드벌룬처럼 하늘 높이 부풀어 오른다. 지금 힘들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자. 세상은 돌고 도니까. 물레방아처럼, 바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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