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사모’는 내가 소속된 모임 이름이다. 일명 ‘골프를 사랑하는 사모님들 모임’의 줄임말이다. 우리끼리는 조금은 자조 섞인, 하지만 정겹고 위트 있는 표현으로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이름하여 ‘골 때리는 사모님들 모임’!
20여 년 전 지금 사는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골프연습장이 딸린 근처 헬스장에 다니면서 만난 친구들의 모임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사를 하거나 가세가 기울거나 혹은 몸이 아파서 골프를 접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열두 명으로 시작했는데 명맥을 이어오다가 지금은 네 명이 남아 친분을 유지한다. 어쩌다 한 팀으로 필드에 나가기도 한다. 퍼블릭 골프장이나 저렴하게 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그 모임에서 함께 가기로 한 골프 약속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저녁을 먹은 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연습장으로 퍼팅 연습을 하러 갔다. 생강차 한 병, 퍼터와 골프공 몇 개를 챙겨 들고서. 단지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 평지에는 헬스 기구가 몇 개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정자가 있으며, 퍼팅 연습장도 딸려 있다. 아파트 9층 정도의 높이여서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습하다 정자에 그냥 앉아서 쉬어도 좋은 곳이다. 가로등 빛이 환해서 늦게까지도 운동하며 실력도 다지고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층간 소음으로 늦은 시간 집에서 퍼팅 연습이 곤란할 때 이곳을 찾으면 더더욱 좋다.
흰 볼을 여러 개 연습장 바닥에 흩어놓고 단거리·중거리·장거리 퍼팅을 연습했다. 한 볼 한 볼 신중하게 하다 보면 정신 집중이 돼서 좋고 잡다한 생각들이 증발해서 좋다. 퍼팅하다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면 둥근 달이 방긋 웃고 있다. 황홀감이 든다. 저녁이 주는 정서가 아침의 부산함보다는 편안함을 줘서 좋고 들꽃의 향기를 실어오는 감미로운 바람과 넉넉한 공기가 좋다. 한낮보다 조용해서 좋고 하루의 일을 끝내고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고 넉넉한 마음에 생각도 상상의 나래를 편다.
홀컵에 들어간 흰 공을 꺼내다가 달을 한번 쳐다본다. 하늘엔 둥근 달이, 정자 옆에는 환한 둥근 가로등이, 바닥에는 둥근 홀컵과 흰 공들이 거리 재기를 하고 있다. 흰 공들이 엉뚱하게 은전 같다는 생각이 드는 터에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가 떠오른다. 하늘에 있는 달만 쳐다보고 살면 바로 코앞에 떨어진 바닥의 은전을 줍기 어렵다. 문명사회를 등지고 원시의 타히티섬에 정착한 화가 고갱(스트릭랜드)을 빌어 삶과 예술의 간극(間隙)을 형상화한 《달과 6펜스》에서 ‘달’은 ‘이상’을 ‘펜스’는 ‘현실’을 상징한다.
살아가면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에만 치우쳐도 안 되겠지만 현실에만 안주해도 세속적이고 비루해지기 십상이다. 이상 따윈 접어두고 현실에만 안주하는 사람들에겐 반박하고 싶은 말이 또 떠오른다. 그렇다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허리를 굽히고 살면 하늘의 무지개는 언제 본단 말인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현실과 이상을 적절히 조화롭게 살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중년을 건너는 여성의 삶은 홀가분할 것 같으면서도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녀를 결혼시키고 한숨 돌리려니 얼마 안 돼 손자를 봐 달라고 손을 내밀고, 시부모가 쇠약해지니 집에서 돌보거나 병원을 드나들 때도 많아진다. 주변에서 지인의 남편이 타계했다는 갑작스러운 비보가 날아오기도 하고, 본인에게 갑작스레 암 같은 병마가 찾아오기도 한다. 경고 없이 불쑥 빨간 등이 켜지는 것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자들은 아내·엄마·며느리·시어머니 역할을 하느라 크고 작은 희생도 따랐다. 이제 우리 나이 또래에서 유행처럼 하는 말은 모든 것 참고 살다가 아까운 돈을 병원에 갖다 바치지 말자는 것이다. ‘적절하게 즐겁고 유쾌하게 살면서 아프지 말자’로 귀결된다. 그런 뜻에서 친구들과 가끔은 등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여행도 가고, 어쩌다 골프도 치러간다. 올해 들어서는 ‘코비드 19’로 활동 범위가 많이 위축되었다. 그중에서도 골프에서 느끼는 재미가 가장 큰 기쁨을 주니 골프를 배운 건 잘한 일인 듯하다.
필드에 서는 날엔 바빠서 연습 한 번도 못 했다고 각자는 엄살을 떨면서 겉으론 말하지만, 속으론 나름 칼을 갈고 나온다. 누구든 승부 근성이 있기 마련이고 친구보다 잘 쳤을 때는 짜릿함이 크기 때문이리라. 거리감과 방향감이 좋고 잘 맞을 때는 자신도 흡족하다. 공이 잘 맞아야 여유 있게 다음 홀에서 잘 칠 수 있고 풍광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그래야 스트레스도 날리고 만족감이 극대화된다. 제대로 맞은 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높이 날 때는 내 기분도 덩달아 함께 날아오른다. 뭐 제대로 맞은 적이 별로 없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퍼팅 연습장에서 한 볼 한 볼 신중하게 퍼팅을 하고 있는데 어둠이 짙어지고, 집중훈련을 하고 연습을 마쳤다. 정자에 앉아서 준비해 온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하늘에선 달이 나를 쳐다본다. 집으로 가려면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 평지를 걸어가야 한다. 지금 앉아있는 이곳 쉼터는 마치《달과 6펜스》의 중간 어디쯤처럼 느껴진다.
살다가 현실에 지칠 때면 나는 퍼터를 들고 지대가 높고 경관이 좋은 이곳 연습장 계단을 오른다. 《달과 6펜스》의 중간 어디쯤 위치한 곳을 찾아.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Stairways to Heaven)>을 읊조리며. “반짝이는 건 모두 금이라고 믿는 소녀가 있습니다/그녀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사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