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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13. 2021

집에 와서 무능력자가 되었습니다.

8년 경력공백기 극복하기(1)

우리 엄마는 하고 싶은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림도 그리고 싶었고, 간호사도 되고 싶었다는데, 사실 밥상을 뒤엎고 술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게 일상다반사인 폭군같은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뭐가 됐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게 가장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정말 원하던 꿈은 이루지 못했던 엄마의 바램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옮겨왔고, 엄마는 내가 어릴때부터 내가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자라나는걸 간절히 바라셨다.


나는 또래보다 말이 빨랐다는데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어린애가 말을 어찌나 똑 부러지게 잘 하는지 아나운서로 대성할 줄 아셨단다. 그래서 엄마는 편법을 동원해서 나를 1년 일찍 사립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님;;)에 입학시키셨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 오빠가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해줘서 그런지 다행히 나한테는 공부쪽으로는 그렇게 큰 부담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운동, 피아노, 글쓰기, 그림그리기, 외국어 등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도록 엄마가 적극적으로 등을 밀어주셨고, 내가 교내외 대회에서 상이라도 받아오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여자도 자기가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사는 세상이 될거라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포기하지 말라고 일상속에서 수도 없이 강조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내가 -그게 뭐가 됐든- 직업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될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10대에서 20대를 거쳐가는동안 여자가 결혼하고 주부가 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으로 점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대학교 시절에는 동기들 중 그 누구도 졸업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후 친한 동기들은 앞다투어 취업을 했고, 나도 졸업한 해에 취업을 해 이후로 13년을 내내 회사원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 어느날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찾아왔고, 나는 하루아침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모듬 초콜릿 상자에서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빼먹듯이 재미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만 찾아 이직하다가 본격적인 커리어 점프를 노리고 이직한 회사는 대기업 그룹사였는데, 입사한지 1년만에 오너가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해체 수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주중에 같이 거주하면서 아들을 돌봐주시던 엄마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부탁을 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 맞물렸다. 야심차게 이직한 회사의 공중분해로 인한 허탈감과, 다시 조건 맞는 새 직장을 찾는 어려움, 생판 모르는 사람을 시터로 고용해야하는 불안감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남편이 한 마디를 건넸다.


"순아, 근데 왜 전업주부가 되는 건 생각을 안해?"


뭐? 나보고 전업주부가 되라고...??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한 진리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전업주부가 된다는 것은 내 안에서는 일말의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건 남편에게도 같을 줄 알았다. 우리는 우리 가정을 꾸려나가는 공동경영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남편의 '부양가족'이 되어 생계의 부담이 오직 남편 한 명에게만 지워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혼자 벌어 나와 아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니, 남편에게는 너무 가혹한 부담이고 나에게는 너무 편리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진심인 것 같았다. 우리의 아이를 보살피는게 돈을 버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내가 전업주부가 되는건 회사 다니면서 돈 버는 것과 똑같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사실 그 말을 100% 온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혼자 세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어떻게 부담이 없을 수 있을까. 회사를 다니다보면 갑자기 확 때려치고 싶은 괴로운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럴 때 가족 부양의 의무 때문에 물러날 곳이 없는 벼랑 끝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큰 심리적 압박감이 되어 스트레스를 배가시킬 것인가. 때려치울 수 있는데 참는 것과, 때려치울 수 없어서 버티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나도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내가 이제까지 해온 모든 노력과 성과를 물거품으로 돌리고, 집에서 밥하고 청소, 빨래'나' 한다는 것에 엄청난 거부감이 있었다. 커리어와 육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멋진 워킹맘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왠지 나만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어쨋든 이도저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달을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 이직과 시터 고용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건 임시적인 상황이야, 일단 좀 해보고 천천히 다른 일을 찾아보자, 분명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하면서 절대 전업주부로 안착하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근황을 묻는 지인들에게는 '일단 좀 쉬기로 했어', '엄마가 건강이 안 좋으셔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말을 굳이 강조하며 변명하듯이 했고, 그러고 나면 왠지 모를 자괴감에 뒷맛이 씁쓸했다.




전업주부 1일차,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어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한동안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뭘 해야할지 몰랐다. 청소를 해야 하나, 장을 보러 가야 하나, 아니면 빨래를 돌려야 하나?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이리저리 집안을 서성이다가 괜히 노트북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하곤 이내 닫았다. 그리고 또 집안을 어색하게 돌아다녔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빈둥거리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어 어쩔 줄을 몰랐다. 13년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할 일이 항상 줄을 서 있는 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온전히 주부가 된 나는 아무도 내게 일을 시키지 않는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뭘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있는게 어색했고,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 퇴근한 남편이 "오늘 별일 없었어?"라고 하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주를 그렇게 어색하게 지내고 서서히 남편의 출퇴근과 아들의 등하원에 맞춰진 전업주부의 시간표가 만들어졌다. 다른 유치원 엄마들과의 교류도 하나씩 생겼고, 아이와 놀이터에 나가는 시간, 나 혼자 적당히 노는 시간도 조금씩 생겼다.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표 안에 칸이 하나씩 채워져도 여전히 불안했다. 아직도 그냥 '놀고 먹는' 것 같았다. 예전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한테 안부를 묻는 연락이 오면 있는 힘껏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대화의 알맹이들은 점점 줄어갔다. 불안하고 우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할 일을 찾았다. 매 끼니마다 새로운 반찬을 세 개, 네 개씩 만들어 올렸고, 커튼, 이불 빨래를 했고, 아들 방 가구 배치를 바꿨고, 하다하다 화장실 셀프 리모델링, 부엌 타일 교체까지, 닥치는대로 할 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SNS에 보고하듯이 꼬박꼬박 올렸다. 내가 마치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즐겁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볶음밥에는 몇 가지 재료가 들어갔는지, 그걸 아이가 어쩜 얼마나 맛있게 잘 먹던지, 오래된 붙박이장이 셀프 페인팅을 통해 얼마나 마법처럼 예쁘게 변신했는지, 낮에 다른 엄마들과 함께한 티타임이 얼마나 여유롭고 즐거웠는지를 그야말로 아름답게 포장해서 올렸고, 그걸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마치 나의 삶에 문제가 없다고 인증해주는 마약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당시의 나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쪽배 같은 상태였다. 파도가 잠잠할때는 무기력하게 늘어지고, 높은 파도가 밀려오면 여지없이 뒤집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을 대하는 나와, 미친듯이 불안과 우울에 뒤집어지는 나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커서 이러다 인격이 분리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나의 아이를 돌보는 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값진 일이었다.

나는 전업주부가 된 후에 비로소 우리 아들을 제대로 알게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들이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 뭘 좋아하는지, 그걸 왜,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세세하게 알게 되었고, 뭘 가지고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퇴근 후 잠깐, 그리고 주말에 남편과 함께 보던 아이가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인지 처음 알았다. 모든게 서툰 초보 엄마에게도 온전히 의지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보내주는 아이가 너무나 고맙고 예뻤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뭔가를 찾고 싶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아이를 돌보는 육아와, 우리 가족의 쉼터인 집을 청소하고, 건강 밸런스를 고려한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정말 가치있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아쉽게도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노력을 하면 할수록 힘만 들고 재미있지가 않았다. 


화장실 청소는 하루만 걸러도 바닥에 물때가 생기는지 처음 알았다. 풍성한 시금치를 애써 다듬어서 데치면 한 줌도 안 된다는 것도 몰랐다. 베개커버와 시트를 일주일에 한 번씩 빨지 않으면 땀냄새가 난다는 것도 몰랐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이 나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힘들고 어렵기만 했다.


내 주변에는 너무나 멋지게 육아와 교육에 힘쓰고, 잡지에 나올 것 같은 멋진 집을 가꾸면서 자기 생활도 확실히 지키는, 보고만 있어도 입이 딱 벌어지는 멋진 전업주부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엄마들을 흉내내 아무리 열심히 아이를 박물관, 미술관에 데리고 다녀도,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을 끊어 커튼과 테이블보를 만들어 집안을 예쁘게 꾸며도, 아이의 방학 과제를 도와 대기업 PT 수준으로 만들어도 재미는 커녕 힘만 들었고, 보람은 겨우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내 사촌동생은 초등학생 고학년, 저학년, 유치원생인 아들 셋을 키우면서 왠만한 연예인 뺨치는 빡빡한 일정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소화하고 있었고, 내가 알게된 많은 엄마들이 대부분 직장인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말썽 없는 순둥한 아들 하나 돌보는 것이, 반찬투정없고 집안이 어지럽건 말건 아무런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한 남편을 둔 주부의 집안일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좋아하지 않으니, 잘 하지 못하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혼자 마냥 힘들기만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전업주부의 노동의 대가는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다.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뭐가 부족한지도 명쾌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를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납득시켜야 했고, 그게 어려울 때는 SNS의 댓글을 통해 확인받아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나 스스로도 인정하고 만족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뭐가 됐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업주부 3년차에 드디어 재취업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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