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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03. 2021

도망치는게 뭐 어때

나는 살고 봐야지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첫 1~2주 동안은 그동안 진행된 히스토리와 이슈, 관련된 담당자들을 파악하면서 설렁설렁 공부하듯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3주차 들어 관련 실무 회의를 몇 개 참석하고, 4주차가 되니 이제 본격적으로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해결해야 할 업무들이 하나 둘 씩 생기기 시작했다. 음, 그렇구나, 오호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면서 강건너 불구경하던 입장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내 발등....까지는 아니고, 발 앞까지 번져온 불을 어떻게 끌지 머리를 싸매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 걸음 떨어져 관전(?)하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딱 봐도 골치아프고 머리 좀 쥐어뜯어야 할 문제들이 슬슬 눈앞에 떨어지는데 하나씩 열어보다보니 갑자기 엇후 그냥 손 놓고 도망가고 싶네! 라는 마음의 소리가 불쑥 나왔다.


아니 이제 막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벌써 도망???

순간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잘 할 생각을 해야지, 시작도 하기 전에 도망가고 싶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빠진 겁쟁이가 된거지? 아니, 누가 뭐라 해도 나 자칭 프로 일잘러인데? 그 자신감 하나로 이제까지 어떻게든 잘 헤쳐 나온건데???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새싹이 시절에는 맡겨지는 일마다 모르는 것 투성이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누구한테 뭘 어떻게 물어봐야할지도 몰라서 혼자 쩔쩔매는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때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대리님도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처럼 보였고,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특히 일잘러 선배를 보면 어찌나 부러운지, 첫사랑에게서도 본 적 없는 후광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고 싶다, 아니 되겠지, 반드시 될거야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동안 맨몸으로 구르고, 이리저리 치이면서 헤쳐온 사회생활은 말짱 헛수고만은 아니었는지, 어느새 확실히 경험치로 쌓여 새싹 시절에 비해 할 수 있는 일과 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고, 거기에 보너스로 요령과 눈치라는 것도 적당히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제는 일을 보면 이게 얼마나 골치아픈 일일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수십 번의 회의를 통해 치열하게 싸우고 설득해서 쟁취해내야 할 미션일지 대충 견적이 나온다. 거기에 같이 일해야 하는 관련 멤버들 중에 한 두명이라도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이 보이면 이건 링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진다고 해야 할까, 일단 맥주라도 들이키고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 각이다.


회사는 겉으로 얼마나 멋지게 포장되어 있건,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는 곳이다. 어쨋든 내가 조직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해야 생존이 가능한 정글인 것이다. 회사생활을 아무런 부담없이 맘편히 하는 사람은 아마 오너 패밀리 아니면 퇴사 한 달 앞둔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 아주 죽을 듯한 프레셔는 아닐지언정 우리는 매일 어쨋건 크고작은 부담감을 안고 출근하고, 작은 안도감과 함께 퇴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치열한 전쟁터에서 항상 모든일이 계획한대로, 순조롭게, 협조적으로 술술 잘 풀릴리가 만무하다. (만약 항상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면 오너 패밀리임에 틀림없다;;) 많은 경우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튀어나오고, 몇날 며칠을 고심하며 세운 계획에도 반드시 빠트린 부분이 뒤늦게 발견되며, 일에 도움은 커녕 발목만 잡는 민폐 진상들도 꼭 한 둘씩은 있기 마련이다. 실무자들끼리 간신히 만들어낸 작업물이 윗선의 기분 하나로 완전히 원점으로 뒤집어지는 일 역시 부지기수고, 고생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빈번하다.

경력이 5년, 10년, 15년... 쌓일수록 그 동안 겪은 우여곡절도 날짜 수 만큼 쌓이고, 그러다보면 이번처럼 업무 꼭지 하나만 봐도 대충 한숨의 견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 그 쌩고생을 또 처음부터 해야 하는구나'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도저도 다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 있다는 건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전자에 뚜껑을 꽉 막고 계속 가열하기만 하면 결국 뻥 터지지 않나? 대폭발로 망하기 전에 주전자를 살릴 수 있는건 스팀을 빼줄 수 있는 작은 구멍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안전장치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손쉬운 것으로는 주말에는 일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마음껏 놀기,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 갖기, 찰떡같이 마음 맞는 동료들과 술 마시기, 처음에 컨펌 제대로 안해서 프로젝트 뒤집어 엎은 부장님 욕하기 등이 있고, 조금 더 쎈 것으로는 이력서 업데이트하기, 날짜칸 비워놓고 사직서 써놓기, 연차내고 면접보러가기 등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평소에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안전장치는 바로 내가 원하면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조금만 힘들고 수틀리면 바로 튄다는게 아니라, 결국 회사나 일이 내 인생 자체는 아니며, 나에게 직접적인 데미지가 가해지기 전에 나의 의지로 얼마든지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큰 숨통 틔는 구멍이었다.


안그래도 세상에는 내 의지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지 않나. 회사는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크고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중 하나임에는 틀림 없다. 번아웃되서 육체적, 정신적인 데미지를 너무 크게 받기 전에, 회사나 일이 내 인생보다 더 커져서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됐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든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 후로 오히려 나는 알 수 없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밖에 갈 곳이 없어, 이 길만이 내 살 길이야, 죽어도 버텨야 해 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이미 진작에 뻥 터져서 방구석폐인이 됐을 것이다. 오히려 언제든지 놓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래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에도 수십 번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망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되면 말지 뭐 하는 생각이 오히려 처음 닥치는 문제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돼 주었다.




다 놓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은 보통 업무 강도가 피크인 단계에서 나오는데 이번엔 시작하자마자 온 걸 보면 내가 그만큼 회사생활을 오래 했구나 싶다.

그럼 이번에도 뭐 한 번 해보고...


아님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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