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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Jul 27. 2021

착하게 살자

레퍼런스 체크 진행하겠습니다.

직장 생활을 한 십여년간 나는 어쩌다보니 여러 번의 이직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이직 절차에 대해서는 나름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새로운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됐다. 사전 스크리닝 인터뷰와 실무, 직무 인터뷰 포함 두 달에 걸쳐 총 3번의 면접을 진행하고 이제 끝났구나 싶었는데 마지막 단계로 레퍼런스 체크를 진행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나는 같은 업계 내 이직일 경우에 알음알음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평판조회'는 경험해 봤지만,공식적인 '레퍼런스 체크'를 요구받은 경우는 없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공식적인 레퍼런스 체크는 보통 외국계 회사에서 주로 진행하고, 경력직이면 일반 회사에서도 종종 요구되는 절차라고 한다.


레퍼런스 체크 대상으로는 전 직장의 직속상사, 동료, 부하 이렇게 세 명을 알려달라고 했다. 회사에서 전 직장에 직접 컨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레퍼리를 직접 알려주는 거라면 당연히 나한테 좋은 말 해줄 사람만 골라서 낼텐데 그럼 레퍼런스 체크의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이런 경우에는 꼭 그 사람이 가진 어두운 과거(!)를 캐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최소 세 명은 가진 사람인지를 검증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구나...

레퍼런스 체크에는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면접에서는 누구나 당연히 자신의 장점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면접이라는 것 자체가 나는 이렇게 좋은 인재이니 꼭 나를 뽑아야 한다고 면접관을 설득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는 레퍼런스 체크가 혹시 그 사람이 전 직장에서 사고친건 없는지, 면접에서 한 얘기에 거짓은 없는지, 실제로는 악평이 자자한 사람이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세 차례의 면접을 진행하면서 나는 오직 합격 여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사실 면접에서 분위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어떤 루트로 출퇴근하고 점심은 어디서 먹을지 생각하는 등 머리 속으로는 이미 입사한 거나 다름 없었다;;) 갑자기 생각이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제까지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주변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로 가시를 세우고 살아온건 아닌지, 나의 업무 능력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갑자기 지난 십여년의 나에 대한 성적표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인간관계도 원만했고, 업무 능력도 결코 떨어지지 않다고 나름 자신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걸 구체적으로, 아니 면접관이 설득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얘기해 줄 사람을 찾으려니 그렇게 하늘을 찌를 듯 했던 자신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회사생활이었다.  

특히 좀 어렸을 때는 무슨 정의감에 그렇게 불탔는지 억울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에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상사에게도 따박따박 할 말 다 했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쳐흐르던 시기에는 일을 건성으로 하거나 팀에 반복적으로 민폐 끼치는 사람에게(나름 수위조절은 했다고는 해도;) 분노를 금하지 않았으며, 낙하산으로 굴러들어온 상사에게 뾰족하게 대하는 등 이불킥 모먼트가 한 두개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정말 지극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어리석었다.

회사라는 곳은 구조상 어쩔 수 없이 권력이라는 것이 작용하는 피라미드 형 조직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부조리한 업무 지시나 환경, 부당한 평가는 어느 곳이나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어야 했다. 무능력한 인간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그런 인간 때문에 내가 피해를 받는다면 거기에 울분을 토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역량이 그 정도까지도 커버 가능하다는 것을 상사에게 은근히 어필했어야 했다. 낙하산으로 내려온 상사가 꼴보기 싫었어도 그에게 적대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정도의 '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요령있게 처신했어야 했다.


어차피 모두에게 공명정대할 수 없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나는 어리고 혈기왕성해;; 앞뒤 분간도 못하고 그저 정의만 찾으면서 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물론 나는 너무나 소중하고 멋진 선배들과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을 만났고, 열정적으로 일에 빠져 짜릿한 성취감도 경험했으며, 일적으로도 값진 경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고 또 너무나 큰 감사함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더 특별했던 몇몇 순간들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서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내가 사회생활을 이어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미성숙함으로 등진 사람들과, 또다른 형태의 성취로 이어질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서는 단지 내가 너무 어렸다, 세상을  몰랐다 라는 말로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후회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좀더 둥글게 살았더라면, 좀더 감정 컨트롤을  했더라면, 좀더 넓은 시야를 가졌더라면...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쉬움은 짙어만 간다.




나는 이제서야 회사에서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봤자 어차피 일하는 곳이고,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물론 내가 마더 테레사도 아니고,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고문관 같은 사람을 한없이 너그럽게 받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최소한, 적어도 감정적으로 등을 지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흔한 노래 가사처럼 우리네 인생은 모르는 거라서, 너무 싫어서 평생 안보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을 새 회사에서 나의 클라이언트로 만날 수도 있고, 하필 그런 사람에게 나의 레퍼런스 체크가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나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적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것에 최소한의 동기부여 정도는 되지 않을까?


레퍼런스 체크 요청이 뜬금없는 인생 고찰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좋은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기꺼이 나의 새출발을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떠오르면서 그래도 괜찮게 살아왔다는 안도감에 조금씩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행이다, 아주 막 산게 아니어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이제 진짜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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