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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Jul 12. 2021

잘 살고 있음 증명하기

인스타그램 하세요?

아직 장마철까지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지난 몇 주 동안은 유난히 비가 많이, 자주 왔다. 온도는 점점 높아지는데 습도까지 덩달아 올라가니 잠자리도 영 꿉꿉하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니 낮에도 영 개운하게 일을 할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지난 주말, 드디어 그동안 덮어온 폭신한 이불을 집어넣고 여름용 와플 이불을 꺼냈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나와 선풍기를 자연풍으로 틀고, 새 시트를 깐 매트리스 위에 누워 와플 이불을 덮으니 세상 시원하고 뽀송뽀송한게 천국이었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이 행복함을 어디에 좀 드러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벌떡 일어나 침대를 다시 세팅하고 이런저런 필터를 써 인스타 감성 충만한 연출샷을 찍었다. 제목은 '여름의 시작' 정도면 좋겠지~


그런데 막상 인스타그램에 올리려 앱을 실행하니 인스타 피드에는 딱 봐도 헉 소리 나는 사진들이 줄줄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화려한 호텔 테라스에 패디큐어가 반짝이는 발과 와인잔의 투샷, 군살이라고는 1g도 없는 몸매와 레깅스 장착의 폴댄스 스튜디오, 꽃시장에서 사왔다는 예쁜 꽃이 장식된 풀세팅 테이블, 온갖 재료가 꽃힌 꼬치구이 그릴이 있는 캠핑장, 인기 최고라는 도넛 카페의 도넛 5종과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인 테이블...


몇 번의 스크롤 다운 후 내 와플이불의 뽀송함은 갑자기 너무 초라한 행복이 되어 버렸다. 여름용 이불을 꺼내 쾌적한 여름밤을 보내게 되었다는게 사진까지 올려가며 나눌 이야기가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쭈굴해진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와플이불을 덮었지만 그 기분좋음은 이미 처음 누웠을 때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새 소식을 올리지 않는 건 매번 이런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반은 주위 친구들의 성화에, 반은 재미있겠다 싶은 호기심에 SNS 계정을 만들었지만 처음 얼마 동안만 신이 나서 이것저것 찍어 올리고 결국 얼마 못 가 업로드가 뚝 끊기고 말았다.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면 일단 지인들의 엄청난 칭찬과 공감이 달리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도 살아 있었냐며, 너무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오는 경우가 있어 너무 신이 난다. 나도 정성스럽게 답글을 달고, 댓글 써준 사람들의 SNS로 찾아가 또 댓글을 달고 하면서 갑자기 인간관계가 엄청나게 확대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차츰 이 모든 과정이 게임에서 퀘스트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느껴졌다. 매일 SNS에 올릴 꺼리(?)를 찾아 사진을 찍고, 댓글이 달렸는지 확인을 하고, 나를 찾아준 사람의 SNS에 답방을 하고... 게다가 며칠이라도 업로드를 안 하면 갑자기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것 같은-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위기감이 들어 스마트폰을 들고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이 과정을 왠지 모를 의무감에 매일 반복하면서 나는 천천히 지쳐갔다.


그런데 그것보다 내가 SNS에 아예 발길을 끊게 된 것은 들어갈때마다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일상 때문이었다. 어떻게 다들 이렇게 멋지고 재미나게 사는지 부럽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런 데가 있는지도 몰랐던 힙하고 화려한 카페와 레스토랑. 광고의 한 장면 같은 서핑이나 패러글라이딩, 실내 클라이밍 등의 액티비티들. 독서토론, 와인 테이스팅 같은 소셜 모임에서 멋진 자연 속의 캠핑까지. 뼛속까지 집순이인 나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을 온갖 액티브하고 화려한 세계가 SNS 피드에는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었다.


베이킹이 취미인 나는 갓 구워낸 파운드케이크의 크랙이 예쁘게 터졌을 때, 오랜만에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이 하드커버로 출시되었을 때, 옷장 정리를 하다가 10년도 전에 산 너무 좋아했던 여름 원피스를 발견했을 때, 비오는 날 새로 산 귀여운 복숭아 프린트의 우산을 처음 썼을 때, 남편과 밤 늦게 배스킨라빈스의 파인트 통을 가운데 두고 긴 스푼으로 서로 좋아하는 맛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을 때, 두근두근함으로 가슴이 뻥 터질 것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그냥 그 순간의 너무나 소소한 기분좋음이, 그리고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너무 감사하고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 하고 조금은 사치스러운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아마도 이 사회에서 내가 발딛고 설 자리를 찾아 나름 치열하고 조급한 젊은 시절을 지나와서 이 순간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큰 행복감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이런 순간들은 사진에 담기도 애매하고, 굳이 남들에게 드러낼 만큼 포장하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애써 잘 연출하고 포장해 SNS에 내놓아도 왠지 공개된 순간 더 이상 내가 느낀 그 순간이 아닌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뭔가 애써 자랑한 것 같아 쑥스러움에 스스로 민망해질 때도 있다.


세상에는 SNS를 생활의 활력소로, 새로운 정보 소스로, 자신의 마케팅 툴로 잘 활용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에게는 SNS가 뭔가 억지로 짜내고 남들의 반응을 살피며 힘들게 이어가는 활동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볍게 즐기는 재미난 놀이터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렇게는 되지 못했다. 나에게 순간을 남길만한 행복한 순간은 여전히 소소한, 그야말로 올릴 꺼리도 되지 않는 일상 속에 있고, 새롭고 멋진 장소에 가고, 세련된 요리를 먹고, 깜짝 놀랄만한 액티비티를 하는 것은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SNS가 대세인 이 시대에서, 내 삶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남들의 화려한 삶을 보고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담대함도 갖지 못한 나는 그냥 SNS에 최대한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매일 SNS에 소식을 올릴 정도로 열심히 살고 있는 당신의 열정, 너무 멋져요.

아무에게도 인증하지 않았고, 나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은 1년 넘게 잠잠하지만, 나도 나름 열심히, 충분히 잘 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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