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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Jun 24. 2021

다시 시작하는 것의 두려움

이제와서 내가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큰 굴곡 없이 살아온 그야말로 평범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여러 번의 ‘재시작’이 있었다. 


IMF로 중단된 유학으로 졸지에 대학 중퇴자가 되어 좌절과 혼란의 하루하루 속에 발버둥치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던 때. 졸업 후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고 3개월의 공을 들여 도전했던 직장에 합격하지 못하고 갑자기 백수가 되어 자괴감에 외출도 못하는 나날을 보내다 겨우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 신나게 열정을 갈아 넣으며 다니던 회사에서 영문 모를 인사를 당하고 멘붕 속에서 이직에 성공했을 때. 육아로 인해 수 년을 전업주부로 지내다 겨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다시 시작’이라는 말에는 뭔가 시원한 바람, 상쾌한 희망이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그 전까지의 무겁고 힘든 짐을 떨치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어 시선을 돌리고, 밝고 희망적인 앞을 기대하게 하는 긍정적인 힘.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의 재시작에는 모두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쓰라린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좌절과 상처를 안고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재시작은 항상 절반 이상이 어두운 먹구름 같은 불안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과연 새로운 환경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해 본 적 없는 일을 배워가며 잘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실수를 또 반복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열심히 해도 회사가 망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어디나 싸이코는 하나씩 있는데, 여기엔 또 얼마나 미친놈이 있을 것이며 어떻게 피해갈까… 등,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희망적인 두근거림이 아닌, 온갖 걱정과 불길한 예감에 어수선한 두근거림이 압도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언가 새로운 것, 그것도 예상치 못했던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도전하고 있다. 그건 내가 쉽게 꺾이지 않고 몇 번이든 다시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오뚝이형 인재라서가 아니라, 그게 어쩔 수 없는 삶의 흐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원하고 꼭 해 보고 싶어서 하는 도전도 있지만, 인생은 계속되고 상황은 매일 바뀌고, 어제와 똑 같은 모습으로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점점 도태되는 것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인지되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뭔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 때의 ‘뭔가’란 대부분 새로운 것, 안 해본 것, 자신 없는 것일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또 다시 움츠러드는 나를 본다.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 그만큼 자신감도, 여유도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이 커지는 것은 왜 인지 참 모를 일이다. 나이로는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고도 남았는데, 내 속에는 여전히 시험장 수험표를 들고 다리를 달달 떠는 어린 날의 새가슴 소녀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등을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는 건 '이제와서 내가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한 질문이다. 이미 젊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나이, 그나마 이제까지 쌓아온 삶의 발판을 잃어버리기 싫은 욕심, 그냥 이대로 무난하게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도 좋지 않나 싶은 달콤한 유혹에 결론도 없는 고민의 쳇바퀴만 드르륵 드르륵 굴러간다. 


사실 또 다른 시작을 앞둔 나에게 이 불안감과 걱정을 단 번에 날려줄 마법의 주문 같은 건 없다. 

가족과 친구들 같은 다른 누가 옆에서 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리 큰 소리로 응원을 해준다 해도 오히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부담감에 내 마음은 더 납작하게 쪼그라들 것이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는 점을 보기도 하고, 다양한 자격증으로 자신을 무장하기도 하고, 템플스테이를 하거나 자기개발서를 읽기도 하고, SNS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면서 마인드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나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이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은 결국 그냥 시작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열심히 달려보는 것 밖에는 없었다. 


두려움을 안고, 어떤 결과일지도 모르면서 있는 힘껏 달리는 것은 참 힘들다. 우리의 삶은 영화에서 초고도비만 인간이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1~2분 정도의 짧은 컷을 지나 드라마틱하게 40kg 이상을 빼고 ‘변신’에 성공하는 식의 유쾌한 전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1분 1분을 우리는 실제로 살아내야 하고, 달콤한 과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차라리 모든 것을 내던지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순간을 너무나 많이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을 살아간다. 겉으로 보여지는 노력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때로는 좌절하고, 상처에 괴로워하고, 과연 이 끝에 뭐가 있을지, 뭔가 있기는 한지 불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을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 너무나 든든한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조그만 성과가 너무나 큰 자신감과 보람이라는 상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또 전혀 새로운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다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소중한 순간을 깜짝 선물처럼 받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독여준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기는 하자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고 조용히 나에게 말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조용히, 하지만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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