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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17. 2021

이 넓은 세상에 내 자리 하나 없을까

8년 경력공백기 극복하기(2)

(전 편에 이어...)


전업주부 3년차에 재취업을 결심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먹었다고 환상적으로 멋진 일자리가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날리 만무하다.

오랜만에 리크루팅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내가 설정한 필터링 키워드에 맞게 추천된 일자리를 살펴봤다.


충격적이었다.

지원할 만한 곳이 너무나 없었다.

10년전 대학교 졸업 전후로 구직활동을 하고 있을 때 여기도 저기도 모두 경력을 요구(또는 우대)하는 걸 보고 대체 신입은 어떻게 취업을 하라는 건지, 아니 일단 취업을 해야 경력을 쌓는거 아니냐며 혼자 열받았던 상황과 비슷했다. 시선을 끄는 구인공고를 열어보면 당장 요구하는 능력이 내가 가진 것보다 너무 많아 금새 자신감이 떨어지고 힘없이 뒤로가기를 클릭했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바로 쭈굴모드가 되어 있었다.


나는 현역으로 일하던 중에도 제법 이직을 많이 한 편이어서 사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만큼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엄청난 벽이 느껴졌다. 3년의 공백은 구직시장에서는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고, 세상이 원하는 인재의 수준은 내가 멈춰있던 기간만큼 높아져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멈춰선 3년 동안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생각을 한 것 자체가 과욕이었다.




일단 나의 현실을 냉정하게 한 번 되돌아보기로 했다.


일단 풀타임 근무가 불가능하다.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으로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직 길지 않고, 친구와 놀 때나 학원을 왔다갔다 할 때, 키즈카페나 실내 놀이터 같은 곳으로 이동할 때 여전히 일부 동행하거나 운전을 해줘야 했고, 학교 과제나 준비물 챙기기 등 도움을 줘야 할 일도 많았다.


둘째, 현역 시절과 같은 수준의 업무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IT, 콘텐츠 관련 업계에서 주로 일했던 나는 지난 3년간의 업계 근황이나 트랜드에서 멀어진지 오래였고 이는 어느 정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수시로 야근과 철야, 휴일근무가 발생하는 업계 특성상 체력적으로 과거 수준의 업무는 어려울 (아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또, 한 두 시간만 야근을 한다고 해도 당장 아이의 저녁밥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 두 개의 이유만으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폭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남은 것은 시간제 아르바이트나 단순업무 파트타임 정도인데, 시간대비 급여가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의욕을 갖고 할 만한 일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쨋든 내가 다시 일하려고 한 이유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노동의 대가를 급여라는 숫자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생각을 바꿔야 했다.

욕심은 좀 내려놓고 일단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찾자.

하지만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당장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아도 그 다음 단계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나에게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했다.

3개월 안에 취업 성공!과 같은 시간 제한을 두지 말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지치지 말고 찾아보자고 타일렀다.

나의 재취업 결심은 너무 아프고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미있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더 간절히 바랬다.




재취업을 결심한 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리크루팅 사이트에 등록한 이력서를 통해 연락이 닿은 회사에서 하루 5시간의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과거에 몸담았던 곳과는 업계도 다르고 하는 업무도 달랐지만, 어느 정도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나의 장점인 외국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출근과 재택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이 일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급여 자체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에 비해서는 당연히 작았다. 하지만 그렇게  4년을 꾸준히 일하면서 점점  예전에 일하던 감각을 되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한다는 , 출퇴근 시간을 지키는 , 정해진 시간 내에 주어진 일을 마치는 ,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점점 일을 하는 생활 패턴에 익숙해졌다.

또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어느새 엄마의 도움 없이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만큼 자라났고 그렇게 재취업의 가장 큰 벽이었던 엄마로서의 역할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다.


하지만 파트타임으로 일한 4년의 가장  결실은 이제 좀더 본격적으로 일에 욕심을 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까지 돌아온 자신감이었다. 본격적으로 다시 커리어를 쌓고 싶어졌다.  많은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일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4년은 나에게 느리지만 충분한 재활의 시간이 되어주었고, 결국 올해 풀타임 근무로 새로운 회사에 이직하게 되었다. 첫 출근하는 날은 15년 전 대학교 졸업 후 신입으로 첫출근하던 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긴장했고,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과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시기에 비해서는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어딘가 차로 이동하면서, 또 카페에서 밖에 보이는 풍경을 볼 때마다, 길에서 수많은 빌딩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무실과 회사들이 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나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을까. 꼭 예전과 비슷하거나 같은 일자리가 아니어도 분명 어딘가에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텐데, 나도 얼마든지 저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는데, 잘 할 수도 있는데. 아직 내가 찾지 못했을 뿐, 분명히 뭔가 있을 거라고,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포기하지 말자고, 너무 조급해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전업주부로 지낸 3,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4, 그리고 풀타임으로 다시 일하기 시작한 1년까지  8년의 기간 동안 나는  전에는  번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나의 부족한 부분도, 실제로 내가    있는 부분도 부풀리거나 과대포장하지 않고 냉정하게   있게 되었다.


대가를 받고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큰 의미가 있는 기회라는 것도, 또 급여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아직까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노력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한 면이 있어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그토록 원하던 일자리였는데 며칠 출근하다보니 다시 예전의 자유롭던 생활이 그립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나, 전날 밤늦게까지 놀아서 아침에 눈 뜨기 힘든 날;;) 전업주부였을 때는 바쁘게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부럽더니, 회사원이 되니 대낮에 여유롭게 카페나 공원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회사 근처 백화점 지하에서 점심이라도 먹는 날엔 편하게 쇼핑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어이없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일하고 싶어할 때는 언제고...


전업주부의 생활도 결코 쉽지 않다.

회사를 다니거나, 일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아메바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살아간다는 게 원래 그런게 아닐까?

나의 만족을 찾아, 행복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일이고, 그 형태가 뭐든 간에 결코 손쉽게 답이 주어지는 과정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부은 눈에 힘을 주고 출근한다.

퇴근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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