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서

by 담월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벽 앞에 선다. 물리적인 벽이든,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든. 벽은 안전을 위한 경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아가야 할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자주 벽을 떠올린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 가장 먼저 벽지를 고르고, 액자를 걸기 위해 망설이기도 한다. 벽은 단순한 구조물이지만, 그 위엔 삶의 흔적이 남는다. 무심히 지나쳤던 벽 한 면에도 우리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날, 그럴 때 나는 문득 벽을 바라본다. 그리고 가만히 말을 건다.


"나 좀 힘들어."


"사는 게 왜 이렇게 버거울까?"


누군가 들었다면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은 눈치도, 기대도,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꺼내어 얹기만 하면 된다. 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혼자 있고 싶을 때, 마음이 복잡할 때도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아무 판단 없이, 끼어들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은 채 그저 내 말을 다 받아준다.


왠지 벽 앞에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텅 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내 안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과 감추고 있던 속마음, 괜찮은 척하다 삼킨 눈물들, 가끔 벽 앞에서 이렇게 울고, 웃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린다. 침묵으로 또 다른 언어가 되어주는 벽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고맙다. 내 말을 들어줘서..."


살면서 마주하는 또 다른 벽은 보이지 않는 사람 사이의 벽이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어느 순간, 문득 그 벽을 느낄 때가 있다.

오해, 편견, 자존심,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벽 앞에서 우리는 자주 멈춘다.

그럴 때면 말 대신 침묵을 택하고, 더 멀어지지 않기 위해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 끝에 허물어지기도 하지만 평생 그대로 남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결국 ‘닫힌 마음’에서 시작되고 누군가의 따뜻한 노크 소리에 조금씩 허물어지게 된다.


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벽이 있기에 안쪽에서 안심하고, 벽이 있기에 바깥 세상을 꿈꾼다.

벽이 없었다면, 바람과 시선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벽이 있어야 비로소 집이 되고, 벽이 있어야 마음 둘 곳도 생긴다.


결국 벽은 막힘이 아니라 구분이다. 나와 너, 안과 밖, 지금과 앞으로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선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넘을지 머무를지 선택한다.


나는 오늘도 벽을 바라본다. 그 벽이 나를 가두고 있는지, 지켜주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벽은 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벽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선택은 늘 내 몫이다.

<김희연 작가의 '말 없는 대화' 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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