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재밌다] 로빈슨 크루소 3편
<로빈슨 크루소>에는 뜨악하는 순간들이 좀 있습니다.
돈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초반에 로빈슨 크루소 아버지가 중산층 예찬론을 펼치는가 하면.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이 처한 불행과 행운으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봅니다. 그걸 보고 자신의 처지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자각하지요.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은혜 갚은 까치'격의 돈 잔치, 서류 잔치가 펼쳐집니다. 환어음, 총괄 채무 소멸 증서, 배당, 공증, 신탁 등의 단어가 넘쳐납니다. 돈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요즘 문학과는 결이 달라요.
극한 환경 속 인간 생존 드라마 같지만, 한편으로 17세기 식민지 개발 성공사례집 느낌도 납니다. 사례집 발간 주관은 대영제국 청교도 협회가 되려나요? 무인도에 난파되는 고난을 겪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고. 성경 책과 신에 의지하여 홀로 견뎌냈으며,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마침내 영국으로 돌아가서 풍족한 삶을 삽니다.
더 놀라운 것은, 28년간 죽은 사람이 되어 지냈지만, 그의 자산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다는 사실! 주변 누구 하나 로빈슨 크루소의 재산을 가로채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자산이 불려져 있었지요. 정말?! 이럴 수 있는 건가요? 사기성 마케팅과 피싱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 그의 성공담이 부럽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뜨악한 순간은 확장됩니다.
그는 흑인 노예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와 생사를 함께한 무어인 슈리를 노예로 팔아치우거나, 섬에서 만난 원주민 친구 프라이데이를 노예로 부리면서도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17세기 대영제국, 힘 있는 자들의 당연한 한계일 수 있어요. 어쩌면 지금의 저에게도 이런 면이 있을 수 있겠죠.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심하게 행사하는 힘. 코끼리가 발밑의 개미를 신경 쓰지 않는, 당연한 이치.
열린책들 <로빈슨 크루소> 책날개에 쓰여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짧은 평이 확 와닿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제국주의의 원형이다
...
그에게는
남성다운 독립심,
무의식적인 잔인성,
불요불굴의 집요함,
느리지만 효율적인 지성,
성적 무감각증,
계산적인 과묵함 등
전적으로 앵글로-색슨 족 특유의 기상이 넘쳐난다.
이번 60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들여다봤습니다.
자연스럽게 책 내용에 대한 뒷담을 하게 됐고, 다른 결말도 상상해 보았습니다.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88852/episodes/25108335
*어쩌다 함께 책 읽는 다섯 명이서 팟캐스트를 합니다.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30~40대들입니다. 책 읽고 톡 방에서 엄지손가락으로 떠들다 만나게 되어 '엄지작가'라고 명명했습니다. 물론, 진짜 작가는 아니에요, 아직. 팟캐스트는 곧 유튜브랑 통합한다고 해서 팟빵과 네이버 오디오에 올리고 있어요.
*나리, 쓸, 하니, 아지, 쟝. 이 가운데 쟝의 편집과 글입니다.
사족 : 상선이 많이 다니는, 본격 자본주의에 접어드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보니. 성공만큼이나 인간의 욕심과 관점의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책에 대한 의심은 의심, 공감은 공감. 21세기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에게도 공감+귀감이 되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내 땅, 내 건물, 내 섬, 내 별을 갖고 싶다는 욕심은 작동하니까요. 순전히 욕심에, 책의 일부분을 굳이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오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내겐 먹을 것이 충분했고, 부족한 물품을 조달해 줄 원료도 충분했다. 그러니 그 나머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고기를 마련한다면 분명히 개나 해충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그 양보다 더 많은 곡식을 심는다면 모두 훼손될 것이다. ..중략..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효용 가치가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수전노 구두쇠라 할지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였더라면 탐욕이라는 악덕을 깨끗이 치유할 수 있었으리라.
이제 내 삶은 본질적으로 처음에 비해 편안한 삶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더 편안해진 삶이었다. 나는 종종 고기 요리를 앞에 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황량한 무인도에 그 같은 성찬을 차려 주신 하느님의 손길에 경배드렸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의 부정적 측면보다 긍정적 측면을 더 많이 생각하는 법, 내게 결핍된 것보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사고방식의 변화가 가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은밀한 마음의 위안을 주곤 했다.
p.178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