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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안에는 목적지가 없다

내가 아이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걱정되지만 사실 ...

by ㅈㅑㅇ


화가 한 차례 폭발했습니다. 화산이 어쩔 줄 모르고 이런 것 저런 것 쏟아 내듯이, 저도 정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을 쏟아냈습니다. 왜 화가 났던가? 그걸 되짚어 보려고 나와있습니다.








아이와 이야기하다가 화가 났습니다.


며칠 전 방학을 시작한 중학생 아이였습니다. 스스로 계획하지 않는 영어 학습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남이 계획해 주고 이끌어주는 학원은 힘들어서 싫다,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혼자 하는 것은 버거워서 싫다, 엄마가 계획한 헐렁한 책 읽기는 하겠다고 해요. 종종 하겠다고 말만 하고 하지 않고 버티다가, 가끔은 했다고 뻥도 칩니다.


그래도 조금씩 고양이 눈물만큼 읽고 있습니다. 대략 2~3일에 2~3 페이지 정도씩, 가끔 좀 더 많이 하는 날도 있겠지 하는 거죠. '이게 어디냐, 네가 공부하고 싶은 날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조금씩만이라도 해두자', 하는 마음으로, 두고 보기도 하고 독려하기도 합니다. 성취만큼 중요한 것이 부모 자식 간 관계니까, 지치지 않을 정도로, 가랑비에 옷 젖는 정도로만 독려합니다. 이런 실랑이는 아주 익숙합니다. 일상의 디폴트랄까요.


초등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연예인 포토카드 보면서 하루 종일 보내요. 연예인 얼굴, 선물 포장 유튜브, 어느 아이돌이 어디서 몇 위를 했는지 조회수가 몇 인지에 대해 떠듭니다. 핸드폰에 인터넷이 제한되는 다운타임이 있지만, 그때에도 자기 손에서 놓지 않아요. 미리 다운로드하여놓은 음악을 틀으며 지냅니다. 뭐 그럴 수 있죠. 그저 예전에 공부에 관심도 욕심도 내던 때를 떠올리면,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학습을 위해 책 읽기와 한자를 지겹도록 권합니다. 부모 에너지의 90%는 이 실랑이로 소진되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제 할 일 하려고 실랑이 없이 아이에게 무관심하게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빨래, 설거지, 바닥 청소 외에도 밤공기 쏘이면서 산책하고 싶을 때가 있지요. 노년을 생각하면 운동도 해야 할 텐데 말이죠. 책도 읽고 싶고, 읽은 책이나 이런저런 일에 대해 끄적끄적도 하고 싶고, 내 인생을 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 네 인생, 네 숙제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꾸준히 일관되게 아이를 대해주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왜 오늘은 유난히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일까요. '내 인생 내 할 일'로 퉁치고 넘어가지 못했을까요.


아이를 이끌어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간섭 없이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고도 하고,

어느 정도 틀은 잡아줘야 한다고도 하고.

크려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면서도,

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승인을 바라고 있다고도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로 성취와 성장의 실마리를 풀어보고 싶지만, 마인크래프트 게임 쇼츠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저로서는 참 막막하네요. 요새는 어몽어스도 해보고 싶다는데. 거기에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인지 감도 안 잡힙니다. 핸드폰 게임은 차치하더라도 마인크래프트라도 일지를 써보거나, 가이드북을 써보면 어때했는데, 작심삼분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공부를 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렇게 공부로 열 수 있는 길에 대해 부모로서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부모 되는 사람으로서 아이의 이정표가 되어줘야 할 것 같은데, 이정표가 어디를 가리켜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정표가 구실을 못하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났을까요.


어쩐지 아이보다 저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도 같습니다.





정작 화는 아이에게 냈습니다. 화가 나던 순간에는 빨래를 널고 다림질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이에게 너를 위한 영어 책 읽기 하지 않을 거면, 함께 살기 위한 기본을 하러 나오라고 했습니다. 빨래와 정리정돈은 기본이라고 말이죠. 아이는 그제야 영어책을 붙잡았는데, 아니 이렇게 책 읽기로 영어를 익히라는 건 재미있게 하라는 취지인데 이렇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은 겁니다.


그 와중에 빨래를 지금 널지 않으면 꿉꿉한 날씨에 꾸리꾸리한 냄새를 입을 테고, 다시 빨래를 해야 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다 지금 저 린넨 셔츠를 다림질하지 않으면 옷이 쪼글쪼글해져서 나중에 두 배로 힘들 미래가 보이는 겁니다. 어효. 아이들 배고플 시간이 돼서 저녁도 해야 했어요. 아마 산책을 나가려던 참이었다면 화가 덜 났을 테지요.


어찌 저찌 휘몰아치는 파사칼리아 피아노 곡을 14번쯤 들으며 집안일을 해치우고, 베란다 구석 진 곳에 놓아둔 망가진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거기서 또 파사칼리아를 12번쯤 들었습니다. 머리와 귀를 흔들어 댈 정도로 꽝꽝거리는 소리로 듣고 싶어서, 핸드폰에 이어폰 꽂고 들었네요. 대화를 차단하고, 휘몰아치는 건반 소리에, 마음 밭이랑 고랑이 뒤집어졌습니다. 화산이 폭발했던 곳에서는 농작물이 더 잘 자란다죠.


이제 씨앗을 심을 준비가 됐습니다.


중학생 아이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죄송하다네요. 아직 사춘기 폭풍 한가운데는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엄마도 왜 화가 난 건지 잘 모르겠는 상황에 와서, 밑도 끝도 없이 죄송하다고 하다니, 이런 속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나중에라도 네 여자친구한테 그러지 마라, 네 상사한테 그러지 마라, 아랫사람한테는 그럴 수 있겠지만. 어효. 복잡한 마음에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얘기했어요. 이제 집에 가서 얼굴 마주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요. 초등학생 아이는 1시간 책 읽었다며 생색을 낸 후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아무 대꾸 안 하고 나왔습니다. 그래 차라리 이런 반응은 쉽죠. 집에 가면... 그냥 둘 다 안아줘야겠죠?








천국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천국은 아니죠.

서울을 가리키는 이정표에는 서울이 없습니다.

그냥 금속, 페인트, 혹은 종이나 나무일뿐이지요.

그 이정표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도 없어요.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지요.

그래도 이정표는 거기 있습니다.


부모란 존재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아이의 목적지도 아니면서, 아이의 길에 확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거기 있어야 하는 이정표. 그냥 안아주기나 해야겠습니다. 실랑이도 할 수 없죠. 이렇게 쓰면서 다시 실랑이할 에너지를 만듭니다.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만들고요.


이제 집에 가야겠습니다.



claude-potts-ecAj_bnd6s0-unsplash.jpg Unsplash - Claude Po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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