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ㅈㅑㅇ Apr 09. 2023

밀크 커피를 마셨다

<이방인> 유죄의 증거


고소한 라테를 좋아한다.


산미 없이 고소한 커피에 우유를 탄 것을 특히 좋아한다. 고소한 것으로 부족하고 '꼬소꼬소'해야 한다. 따끈한 것도 좋고 얼음소리 나는 차가운 것도 좋다. 시럽을 넣는 것보다는 원두 자체를 달콤하게 블렌딩 한 것을 선호한다.

 

알베르 까뮈도 라테를 좋아할까. 그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밀크 커피를 좋아했다. 편견도 없고 취향도, 주장도 별로 없는 것 같은 세상 쿨한 남자 뫼르소가 밀크 커피만큼은 확실히 좋아한다고 했다.

 

뫼르소는 엄마의 부고 전보를 받고 찾아간 양로원에서도 밀크 커피를 마셨다. 관리인은 장례식 전날 밤샘 직전에 식사를 권했고, 뫼르소는 거절했다. 그러자 밀크 커피를 권했고, 뫼르소는 수락했다. 밤샘 직후에도 한 잔 마셨다.


그가 그때 그것을 거부했다면. 커피 마신 후 자연스럽게 생각 난 담배를 거부했다면. 그의 재판 양상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 그에 앞서. 양로원에 도착하자마자 관리인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엄마를 봤었더라면. 엄밀히 말해 엄마의 사체를 확인했었다면. 그리고 잠시 말없이 서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관리인이 관뚜껑에 나사못을 살짝 박아두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굳이 작업자가 따로 와서 나사를 떼어내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사체를 볼 수 있게 되어있었더라면. 혹은 백설공주 같은 유리관이었더라면.


그의 재판 양상은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엄마를 봤었을 테니까.

 


배심원 측과 나의 변호사에게 질문이 없는가 묻고 나서 재판장은 양로원 관리인의 진술을 들었다. 그에게도 다른 모든 증인들 때와 같은 의식 절차가 되풀이되었다. 자리에 나와 서며, 관리인은 나를 쳐다봤다가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담배를 피웠고, 잠을 잤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키는 무엇인가를 느꼈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판장은 관리인에게 밀크 커피 이야기와 담배 이야기를 한 번 더 반복하게 했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민음사 p.111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그 말이 옳았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p.29

 

출근 후 반자동적으로 마시는 믹스커피를 돌아본다.

내가 누리는 이 작은 호사가 회사에서 성실히 일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으려나.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라테를 바라본다.


내 옆에 놓인 라테 한 잔이

지금 이 글을 대충 쓰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으려나.

아, 휴일 아침에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글 쓴답시고 나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러 나온

이기적인 엄마라는 단서는 될 것도 같다.


Unsplash - Zoe
이전 09화 마음을 단번에 비워버리면 파산하고 말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