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우리 마음 들숨 날숨 보물
꽤 오래전이다. 20대 시절 경기도 어딘가 목장주들이 모인 자리에 갔었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상이 목장주였을 뿐 그냥 그렇고 그런 일반강좌가 열리던 공간이었다. 어느 단체인지 회사인지 농가 대상으로 교양강의도 하고 상품 홍보도 하는 그런 곳이었던가.
당시 나는 늘 바빴고, 또 소 한 마리 키우지 않았지만, 그날 어쩌다가 한가롭게 거기서 그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 요지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식들한테 집이나 땅을 일찌감치 물려주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때 강사가 말하길. 자식과 손자손녀가 놀러 올 때마다 손에 돈을 조금씩 쥐어주면 자주 찾아오겠지만, 한 번에 집을 사준다거나 하면 절대 찾아올 일 없을 것이라고. 손자손녀 왕래하는 것 보고 싶으면 절대 다 놓지 말고 조금씩 주라고. 사람 마음이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그 강사는 <고리오 영감>을 만나봤던 걸까.
우리 마음은 보물이죠.
그걸 단번에 비워버리면 파산하고 말아요.
또 어떤 사람이 수중에 한 푼도 없다는 것이 용서 못 할 일이듯이, 감정을 송두리째 다 내보여 준다는 것도 용서 못 할 일이지요.
그 아버지는 모든 걸 다 내주었어요. 20년간 밸까지 다 빼주고 사랑을 퍼주기만 한 거예요. 그는 자기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주어 버렸어요. 레몬즙을 실컷 짜내고 나서, 남은 레몬 껍질을 딸들이 길모퉁이에 버린 셈이지요.
p.116 <고리오 영감> 발자크, 열린책들.
<고리오 영감>에서 랑제 공작부인이 고리오 씨에 대해 전해주는 말이다. 이 대목에 이르기 전까지 고리오 씨는 책에서 보케 부인 하숙집의 왕따 노인일 뿐 존재감이 미약했다.
그에게 이목이 집중된 것은 파리의 가난한 유학생, 외젠 라스티냐크가 아나스타지 레스토 백작 부인 집에서 부귀와 출세의 냄새를 맡자마자 쫓겨나면서다. 그가 '고리오 영감'이란 이름을 백작 부부 앞에서 꺼냈기 때문이다.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이 백작 부인의 감추고 싶은 아버지란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고리오 씨는 그녀에게 필요한 돈을 구해다 줬다.
그 돈이란 결혼 지참금 외에도 살면서 갖고 싶은 드레스와 장신구, 남편 아닌 연인의 빚, 귀족들이 사교목적으로 하는 게임 하느라 누군가에게 빌린 돈, 그 외 여러 가지 사교계에서 빛나기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품 비용 등이다. 남편에게 부탁하기 어렵고, 스스로 벌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마음을 단번에 비워버리면 파산한다?
마음에도 화폐가치가 있던가.
마음이 거래될 수 있던가.
돈이 많으면 마음이
넉넉해지던가.
부인하기 어렵다.
사람 사는 데는
숨 쉬는 것처럼
돈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사용하는 전기도 비용이 든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돈이 든다. 노트와 펜, 노트북도 비용을 들여 어디선가 샀다. 내 몸뚱이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음식에도 돈이 들었다. 앉아있는 의자, 사용하는 책상과 공간에도 돈이 들었다.
하다못해 내가 이런 생각을 정리하고 끄적거리게 할 수 있는 문자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자는 거래를 기록하기 위해 발명됐으니까.
모여 살아야 하는 인간은
숙명적으로 돈과 한 세트이다.
죽음에도 돈, 즉 비용이 따른다.
고리오 씨 자신의 죽은 몸을 감쌀 시트 한 장 40프랑. 사체를 염하고 수의를 입힌 사람에게 주는 비용 10프랑. 자신을 묻어주는 사람에게 주는 팁 1프랑. 자신의 영혼을 위해 신부님이 해주는 기도 70프랑. 그 외 땅 속 안식을 위한 묘지 계약과 관리 비용 등 끝도 없다.
모든 들숨과 날숨에 대가가 요구된다.
숨 쉬는 것은 그렇게 아등바등 안 해도 되는데. 돈은 나에게 특별한 노력과 운을 요구하는 것 같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필요한 돈인데. 왜 돈과 공기가 이렇게 다를까.
아니 사실 다르지 않다. 달라 보일 뿐이다.
내가 숨 쉬는 것만큼만 돈을 필요로 한다면, 돈 벌고 쓰는 것은 숨 쉬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마음은 보물이다.
마음은 그냥 내게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 그냥 있는 공기처럼.
자기 집을 자식명의로 돌려주거나 사주는 것.
그것은 마음을 단번에 비워버리는 걸까.
마음이 텅 비는 일은 가끔 일어난다.
그걸 파산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쓸 돈이 하나도 없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내게 파산한 게 되나.
내가 남편에게 돈 쓰기 싫다면.
나의 마음은 망한 걸까.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영혼의 텅텅 빈 모습을 보여 주고 나서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p.39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생각이 이른다. 공기처럼 내 주변에 당연히 있기에 별로 고맙지도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냥 같이 있었으니까.
물론 아이 탄생 직후에는 가족에 대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며 온갖 우주적 행복이 있었지만. 자꾸 까먹고 종종 희미해진다.
특히 부모를 향해서는 뭔가 감사하다기 보단 당연하단 느낌 있다. 내편일 수밖에 없는 남편을 향해선 말해 뭣하리. 남들에게 친절하고 종종 가족에게 떽떽거리는 어느 딸내미도 생각난다.
가족들이 서로 파산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난 너에게 줄 것이 더 이상 없다고 외치듯
서로에게 상처 주기 경쟁하듯
그러지 말아야지
엉뚱한 교훈에
이르렀다.
마음을 공기처럼, 돈처럼, 자연스럽게 써보자고.
특히 들숨날숨처럼 당연한 가족들에게.
가정은 감정쓰레기통이 아니지.
우리 마음은 보물이다.
기억해 둔다.
하지만 자네 같은 사람일 경우, 사람은 신이야. 인간이란 더 이상 인두겁을 쓴 기계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움직이는 극장이라고. 나는 오직 감정으로만 살아간다네. 감정, 그건 생각 속의 세상 아닌가?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