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노을 지는 랑데부 포인트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첫 문장은 직선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처럼. 책에 기록된 까뮈의 문장들은 대체로 직선이다. 다만 그 직선이 전하는 메시지는 모호한 곡선에 가깝다. 곡선 중에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의 구분이 잘 안 되고, 무한루프가 가능한 곡선이다. 모호하면서도 끝도 시작도 없는 곡선.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마랭고에서 치러지는 엄마의 장례식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구름처럼 드리워진 열기 속에 파묻힌 페레스 영감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더니 이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찾아보았더니 그가 길을 벗어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나는, 길이 내 앞 저쪽에서 구부러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지방을 잘 알고 있는 페레스가 우리를 따라잡으려고 지름길로 접어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그는 우리와 다시 만났다. 그랬다가 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벌판을 가로질러 갔고, 그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p.29 <이방인> 알베르 까뮈, 민음사
엄마는 종교적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행렬은 오늘 관을 이고 양로원에서 성당까지 걷는다. 양로원에서 성당까지는 걸어서 45분.
뫼르소는 밤샘을 한 직후였다. 죽은 엄마를 가운데 둔 방에서 양로원 사람들과 함께, 불을 환하게 켜둔 채, 관습대로, 불편하게 앉아, 졸면서 밤을 지새웠다. 피로했지만 따뜻한 밀크 커피가 몸을 풀어줬고. 오늘 아침은 회사의 서류더미 속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일상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없는 일상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오랜만의 교외 풍경에 산책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알제 교외의 어느 시골, 붉은 흙과 초록이 어우러진 구릉지대를 상상해 본다. 하지가 막 지난 초여름. 붉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 그림처럼 선명한 집이 띄엄띄엄 보인다. 흙냄새가 훅 끼쳐왔고, 바다의 소금기 섞인 바람이 살짝 불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그는 상실감보다 삶을 느꼈다.
아침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하늘은 태양이 장악했다. 바다가 멀리 아련히 빛난다. 그곳에 검은 옷을 입은 장례행렬이 먹색 아스팔트 길을 걸어간다.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다. 페레스 씨다. 엄마는 삶의 마지막을 느끼는 그곳에 약혼자를 두었다. 약혼자 페레스 씨와 엄마는 매일 저녁 간호사를 대동하고 양로원에서 마을까지 산책했다고 한다.
태양과 더위에 기가 질려 가는 시간. 노쇠한 페레스 씨가 행렬에서 뒤처졌다. 그러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시야에 다시 나타났다.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그 같은 만남 혹은 엇갈림은 몇 차례 더 일어났다. 아니 교차라고 해야 하나. 행렬도 그도 마침내 성당에 도착한다. 그의 얼굴은 흥분과 힘겨움으로 눈물과 땀범벅이 되어 있다. 단 깊은 주름 때문에 흐르지 않고, 관에 칠한 니스칠처럼 번들거릴 뿐이었다.
페레스 씨가 작은 점으로 적갈색과 초록색의 벌판을 질러가는 모습이 책을 덮고도 자꾸만 떠올랐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누구나 스스로 이방인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빠져나갈 길 없는' 태양의 영향력 아래에서, 새로운 장소나 관습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되었다가, 현지인이 되었다가 한다. 마이너가 되었다가 메이저가 된다. 그런 교차점이 하도 많아서 굳이 주류냐 비주류냐, 메이저냐 마이너냐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길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구부러질 수 있다.
그날 아침 뫼르소가 느낀 흙냄새, 평소 엄마와 페레스 씨의 휴식 같은 저녁, 그 모호한 시간들은 구부러진 길이다. 빈틈없고 가차 없는 낮과 깜깜한 밤의 랑데부 포인트.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열려있는 이음새의 시간. 나와 너를 가르는 그 경계. 교차점. 모호한 이방의 시간이다. 노을 번지는 아침과 초저녁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그 시간이 모호하게 열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방의 시간은 잠과 연결된다. 잠에서 깨거나 잠이 든다. 실제로 책 속 많은 장면들이 뫼르소의 잠으로 일단락된다. 엄마의 장례식 장면은 그가 알제라는 빛의 둥지, 도시로 돌아오고, 집에 와서 잠에 빠져들면서 어두워지고, 화면 전환된다. 그렇게 마리와 바다에서 가까워지는 토요일이 시작되고, 일요일로, 월요일로, 일상으로 이어진다.
이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회개를 유도하는 사제에게 외침을 쏟아낸 후에도, 그는 한 숨 잤다. 자고 일어나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마지막 독백을 마무리한다. 일시적 죽음의 상태인 잠을 통해 그는 새로 살아볼 준비가 됐었다. 리셋. 메이저와 마이너의 원점회귀. 교차.
잠은 저녁이란 시간 속에 놓인 아침으로 가는 징검다리이다. 오늘도 우리는 모호한 이방의 시간을 통과한다. 랑데부 포인트는 길이 구부러지는 그곳. 노을 번지는 시간의 그곳에서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마주칠 것만 같다. 깊은 주름 속에 눈이 파묻힌, 관뚜껑 같은 얼굴의 늙은이일지, 바다를 유영하는 마리일지, 내 손에 권총을 건네줄 레몽일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그냥 우연일 것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민음사 p.148(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