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출근한 나는 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침의 그 쪽지도 눈에 아른거렸고, 강하준과 그 여자의 관계도 궁금하고,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너무 신기해서, 정신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별거 아닌 일 일수도 있다. 지금까지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딱히 연예인에 관심을 갖고 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트러스트는 어릴 때 좋아하던 가수였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삼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상심을 잃어가고 있다. 뭔가 모를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고, 내 삶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말이다.
"정신을 어디 두고 있어? 일 안 해? 안 바빠? 요즘 한가해?"
"아니요. 일하고 있습니다."
"다 지켜보고 있다. 괜히 멍 때리면서 월급 날로 먹을 생각하지 마"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평범하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직장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몫의 일을 해야만 하고, 나에게 책정된 월급을 받아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의 이 평범함들이 삶을 지탱하고 유지시켜준다. 그러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옆집에 연예인이 사는 것도, 그가 어떤 여자와 특별한 관계인 것도, 그건 나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냥 나는 내 집을 산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강하준 집 앞에서 쪽지를 찾고 있다.
"분명히 이쯤에 버린 것 같았는데..."
퇴근길에 옆 동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그 쪽지를 보지 않으면, 왠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았다!"
"뭘?"
내가 엎드려서 겨우 구겨진 쪽지를 찾고 있을 때, 찾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는 주변에 누가 서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강하준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뭘 흘렸어?"
다행히도 내가 쪽지를 줍는 건 보지 못한 듯했다. 나는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쪽지를 숨기고,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꺼냈다.
"이거요.. 이거!"
"어?"
내 손에는 어이없게도 동전 하나가 들려있었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강하준에게 나는 무슨 말이 든 해야만 했다.
" 아.. 그러니까요.. 제가 오늘 회사에서 동전을 쓸데가 있어서.. 분명히 챙겨서 나왔는데.. 회사에 가니까.. 없어가지고요... 아침에 여기서 흘린 거 같기도 하고 해서.. 하하하하하... 근데 찾았네요..."
"그게 자네꺼 맞아?"
"예?"
"그 동전 자네꺼라는 증거 있냐고?"
"아... 아니요.. 그게"
"그게 동전에 이름이 쓰여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는 엄연히 내 집인데.."
"아... 그렇죠?? 아.. 그러네요.. 강하준 씨가 흘리신 것일 수도 있네요... 드릴까요?"
"하하하 동전은 됐고! 혹시 김치 있어?"
"김치요?"
"내가 지금 김치찌개가 좀 땡기는 데. 나가기는 귀찮고, 있으면 좀 빌려줘. 나중에 내가 맛있는 와인 한 병 줄테니까"
"예? 와인이요?"
"왜? 와인 좋아하는 거 아냐?"
"예. 전 그냥 맥주 좋아해요. 와인은 전 여자 친구 때문에... 아.. 그보다 있어요. 김치. 김치찌개도 있고요."
우선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행히 맛있는 김치를 담그시는 어머니가 계셨고, 자취생활의 경력으로 김치찌개 하나는 누구보다 맛있게 끊일 수 있었다. 때마침 냉장고에 이사 오기 바로 전에 잔뜩 끊여놓은 김치찌개도 있었다. 그거 한 냄비면 지금의 이 상황을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뭘 귀찮게 가지고 오고 가고 그래? 됐어!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가족도 없다며."
강하준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미 우리 집 앞에 서있었다.
"예?"
"뭐해? 문 열어. 배고파."
"아 예."
나는 얼떨결에 현관문을 열었다. 강하준이 현관을 지나 중문을 여는 순간, 뒷모습이었지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거실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아침에 급하게 먹다만 시리얼 그릇이 올려져 있는 밥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주방에는 이사할 때 올려놓은 전기밥솥만 눈에 들어왔다. 강하준의 입장에서는 정말 텅텅 빈 빈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여기서 노숙하냐?"
"아.. 제가 원래 여기 오기 전에 작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짐이 없어요.. 물론 원체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뭐 이것저것 이제 좀 사려고 하고 있어요. 그저께 이사 와서 아직 아무것도 못 산 거예요. 정신이 없어서"
나는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구구절절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강하준의 표정은 놀라기도 했지만, 뭔가 점점 흥미로운 표정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른데도 좀 보자! 내가 이런 집은 난생처음이라.."
"아.. 뭐.. 봐도 되는데요.. 진짜 별게 없어요..."
"어. 그럴 거 같아.. 얼마나 없나 그게 보고 싶어서"
강하준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같은 구조의 집을 마치 처음 보는 공간인 것처럼 신가한 눈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2층의 침실과 드레스룸에서는 정말 큰 소리로 박장대소를 했고, 내가 그 이유를 말하자 눈물까지 흘리며 웃기 시작했다.
"너 진짜 재밌다. 완전 맘에 들어! 신선한데!"
"예...? 아... 하... 하... 하..."
"근데 우선 어쩔 수가 없다. 가자. 찌개 들고 와."
"예? 어디를?"
"당연히 내 집이지!"
"예? 아까 여기서 드신다고..."
"그러려고 했지! 근데 식탁 있어? 의자는 있고? 나 무릎 아파서 바닥에도 못 앉아. 그냥 내 집에서 먹자!"
"아.. 예..죄송합니다. 그럼 찌개만 들고 가면 돼요?"
"뭘 죄송까지야. 밥은 있어. 김치찌개니까 다른 반찬은 필요 없잖아"
나는 커다란 냄비를 든 채 강하준의 뒤를 따라갔다. 강하준의 집에 들어서면서, 나는 강하준이 내 집에서 놀란 것만큼이나 크게 놀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타운하우스를 보러 갔던 모델하우스랑 내부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 모델하우스랑 똑같지? 그 모델하우스 디자인을 내가 한 거야"
"예?"
"아. 원래 이 타운하우스가 내 팬클럽 회장 했던 놈이 지은 거야. 워낙 오랫동안 봐온 놈이기도 하고, 정도 많이 들어서 뭐라도 좀 도와주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냥 내가 공짜로 모델해주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놈이 이왕 하는 거 모델하우스도 좀 꾸며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도와주는 김에 모델하우스 디자인까지 내가 해줬는데, 나중에 내가 여기 들어온다고 하니까, 그걸 그대로 내 집에다가 가져다 놨더라고. 내 허락도 안 받고 말이야. 그래서 똑같은 거야. 모델하우스랑"
"아. 그럼 원래 처음부터 여기 들어오려고 하신 거예요?"
"아니지. 그래도 내가 모델까지 해주면 잘 팔리겠지 하고 해 줬는데, 생각보다 잘 안 나가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가 하나 팔아준다고 한 거야. 때마침 서울도 좀 지겨워졌었고. 네가 아마 마지막으로 들어온 거지? 너 아니었으면 그 집도 내가 사서 작업실이라도 써야 하나 고민했었어. 여하튼 덕분에 돈 굳었어"
강하준과는 다르게 나는 이 집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 타운하우스를 계약하기 전에 고민이 너무 많이 돼서 모델하우스를 3번이나 들렸었고, 그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수없이 돌려봤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분이 좀 나쁜 건 그 대표라는 사람이 나에게는 계약이 엄청 잘 된다고 했었다.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린다고. 지금 딱 하나 남아서 지금 당장 계약하지 않으면 금방 팔릴 것처럼 이야기했었는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강하준의 집은 모델하우스만큼이나 정리가 잘되어있고, 깔끔했다. 혹시라도 2차 분양을 한다면, 그냥 이대로 사람들을 불러도 될 만큼 정돈된 모습이었다. 문득 다시 궁금증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혼자 사세요?"
"어. 혼자 살지"
"결혼은.......?"
"너 내 팬 아니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팬은 팬인데요.. 그건 전 트러스트 음악만 좋아해서.. 잘.. 강하준 선생님 개인사는 잘 몰라서요..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뭐야? 내가 너한테 뭘 가르쳤어?"
"예? 아니오. 그게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형이라고 해. 형이라고! 넌 이름이 뭔데?"
"아 저요? 준호예요 박준호"
"이름도 생긴 거만큼 평범하다. 그럼 이제 준호라고 부른다 나도"
"아.. 예"
지금 막 연예인과 호형호제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연예인이라고는 먼 곳에서 본 적도 없는 내가, 옆집의 이웃이 되더니 이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까지 평범하고 밋밋하게 살던 내 삶에 나름 신선한 자극이었다.
"준호야! 가서 찌개부터 데워. 배고프다"
우리는 찌개를 끓여서 밥을 먹었다. 반찬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하준이 형은 처음 보는 음식들을 잔뜩 내놨다.
"이거 다 베트남 음식이야. 맛있어!"
"베트남이요?"
"혼자 사니까. 사무실에서 가사도우미를 보내주거든. 근데 돈 아낀다고 베트남 아주머니를 보내는 거지. 근데 일은 잘하시는데, 한국음식을 못하시거든. 아주머니가 나름 맛있게 해 준다고 이것저것 만들기는 하는데. 다 베트남 음식이야. 난 벌써 질렸어."
"어? 진짜 맛있는데요?"
"딱 한 달만 먹어봐. 이런 김치찌개가 확 땡긴다. 야! 맛있는데?"
"괜찮으세요?"
"맛있어! 대박인데? 야! 내가 너 뭐 좀 줄테니까. 나 가끔 이렇게 김치찌개나 좀 얻어먹자"
나는 그렇게 난생처음 연예인이랑 밥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데뷔를 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는 거, 하지만 가수 활동을 하면서 뭔지 모를 갈등으로 데뷔한 지 1년 만에 이혼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5분도 안돼 알게 되는 내용들이지만 본인에게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반주로 소맥까지 말아먹고 나니 몸이 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준호야! 가끔 밥이나 먹고 술이나 좀 하자! 남자끼리 붙어사는데 별거 있냐?"
"예. 형님. 좋습니다."
나는 아직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아마 민석이 놈이라면 보자마자 넉살 좋게 형이라고 부르고 다녔겠지만, 나는 그럴만한 넉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연예인 형이 생겼다는 것은 은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야! 그리고 너희 집 비번 107218맞지?"
"맞는데... 그걸 어떡해.."
"그거 우리 4집 타이틀곡이잖아. 지구의 속도."
"아.."
"트러스트 음악 많이 들은 건 인정!"
트러스트 4집 타이틀곡 107218. 시속 10만 7218킬로미터,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속도다. 고등학교 내내 들었던 트러스트 4집 앨범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다. 처음 이메일을 만들고 비밀번호를 설정해야 했을 때, 나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의미 있는 번호로 딱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의 대부분의 비밀번호가 107218이다. 그걸 알아채다니.
"아까 우연히 봤는데, 아는 숫자라 금방 외우게 되더라고, 여하튼 형이 내일 뭐 좀 넣어 놀 테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나는 알 수 없는 하준이 형의 말을 듣고 집에 왔다. 내일 집에 넣어둔다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지금 나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저녁 내내 내 주머니에 있던 그 구겨진 쪽지였기 때문이다.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형이라고 부르는 관계가 되고 나니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대로 또 안 보고 넘어가면 내일 하루 종일 멍해있을 것이 뻔하다. 어차피 주워온 것은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도망치지 마요. 피하지도 말고, 더 이상은 안돼. 결국 책임져야 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오래 못 기다려요."
이건 무슨 말이지? 이제 막 하준이 형을 알게 된 나로서는 아무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뭐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건지? 뭘 피하지 말라는 건지?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건지? 문란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떠올려 유추해보면 찝찝한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저분한 관계가 아니라면 추측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보지 말걸. 쪽지를 보고 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궁금증만 더 커지게 되었다. 나의 궁금증은 그다음 날 어김없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고, 이제 듣기 싫은 꾸중을 들어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민석이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를 수없이 고민했지만, 전화를 해봤자 또 결론 없는 말싸움이나 하다가 끝날 것이 분명해서 포기했다.
타운하우스에 이사온지 겨우 3일. 그 3일 동안 내 삶은 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 밋밋해서 지루하던 내 삶이 뭔가 다이내믹해지고, 흥미진진해져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황스럽다. 내가 밋밋하고 지루하게 살아온 것은 내 나름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새로운 선택으로 인해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져 가고 있다. 혼란스럽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지금 집에 돌아왔을 때다. 정신적으로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을 때, 내 앞에 펼쳐진 관경은 다시 문을 열고 내 집이 맞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