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형의 그녀가 길가의 고양이처럼 처량하게 현관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고개만 든 채 무덤덤하게 물었다.
"예?.. 먹긴.. 먹었는데..."
"난 안 먹었는데.. 안에 밥 있어요?"
"아마 있을 거예요. 들어가 있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그냥. 자꾸 빈집에 들어가는 거 기분 별로라서요. 꼭 짝사랑 같잖아."
역시 그런 관계인 건가?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긴 했지만, 그녀의 왠지 모를 슬픈 눈빛 때문에 밥부터 먹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지워졌다.
"김치찌개 괜찮아요?"
"예?"
"못 믿겠지만 맛있는 김치찌개가 있어요. 밥도 아마 있을 거고, 들어가요. 차려줄게요"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려고 서둘러 불부터 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서 냉장고에 있던 김치찌개부터 데우기 시작했다.
"꼭 본인 집 같으시네요?"
"예? 잘 안 들렸어요."
"아니에요."
나는 처음에는 잘 못 들었지만, 금세 무슨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렇죠? 그런데 하준이 형은 더 해요. 진짜 잠자는 거 빼고는 거의 제 집에 와서 살거든요. 심지어 친구들도 막 부르고, 그러다 보니까 저도 오히려 이 집으로 도망 오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 사람은 왜 그쪽 집에 자주 가는데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 집이 훨씬 좋거든요."
그녀는 식탁에 앉자 팔짱을 끼고 기대서 거실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사이에 찌개를 데우고, 밥을 담고, 계란 프라이를 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계란 프라이를 한 건 처음이라 나름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노른자를 익히지 않고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먹어요. 김치찌개는 내가 한 건데, 우리 어머니가 김치 하나는 잘 담그거든요. 그래서 나쁘진 않을 거예요." "계란 프라이도 있네"
"뭐 너무 단출해서, 반숙 싫어하는 건 아니죠? 너무 덜 익혔나?"
"좋아해요. 꼭 모형 같네요."
"어서 먹어요. 배고프겠다. 아! 김도 있다. 잠시만요"
그녀는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이 맛있다 맛없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차려준 밥과 계란 프라이 2개, 김과 찌개까지 남김없이 먹을 걸 보니 입에는 맞았던 것 같다. 다만, 너무 싹 비운 그릇을 보니 뭔가 안쓰러웠다. 마치 허기보다는 다른 것을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했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아! 잘 먹었어요. 아주 맛있었어요."
"다행이네요. 뭐 커피라도 줄까요?"
"아뇨. 지금 먹으면 잠을 못 자요. 어차피 못 자겠지만."
"그럼 주스 줄게요. 기다려 봐요."
나는 냉장고에 있는 작은 병 음료를 꺼내 뚜껑을 따서 유리잔에 따라 건넸다. 그녀는 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요? 컵에 뭐 묻어있어요?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제 것도 아닌데요. 뭘."
"여기 산지 오래됐어요?"
"아니요. 여기가 지어진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저는 한 세 달 됐어요."
"이런 데 많이 비싸지 않아요?"
뭔가 이 질문은 의외였다. 내가 느끼는 그녀는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부유한 환경에서 아주 풍족하게 자랐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꾸미고 있는 외모보다는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녀가 마치 내가 큰 부자라도 되는 것처럼 물어보는 상황이 좀 어색했다.
"비싸죠. 솔직히. 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 살기에는. 근데 제가 지금 직장생활을 한 지, 만으로 8년 됐거든요. 정말 8년 동안 열심히 돈만 모았어요. 첫 월급이 200만 원이었는데, 그때 20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어요. 생활은 알바로 모아 놓아 돈을 쓰고요. 그렇게 3년을 모아서 8000만 원짜리 전세 오피스텔에 들어갔고요. 그때부터 300만 원짜리 적금을 5년 모아서 나머지 돈이 생긴 거예요. 물론, 지금까지 모은 돈보다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 더 많지만, 그래도 전 여기서 평생 살 생각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제는 좀 천천히 갚아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좀 구질구질하죠?"
"아니. 좀 멋있는데요."
"그래요? 다행이다. 실은 이 집 계약하기 전에 저도 외제차 한 번 타볼까 하고 계약했다가 취소하고 여기 온 거거든요'
'잘했어요. 멋있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이런 집을 살 수 있는 거. 난 아직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문득 그녀가 지금 뭔가 고민이 많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몇 살인데요?"
"24살이요"
"나랑 딱 10년 차이 나는구나. 난 내가 멋있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후회되는 것 투성이지. 나는 너무 재미없게 살았거든요.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는 살아왔지만, 그 성실함을 핑계로 나는 너무 심심하게 살았어요. 수업 째고 술 마시는 것도 못 해봤고, 흔한 해외여행도 한 번 못 가봤고요. 돈을 벌면서도 낭비 한 번 안 해봤거든요. 그니까 통장에 돈은 모여도,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런데 내 맘대로 사는 것도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아요. 그것도 그 나름대로 너무 허무해. 노는 것도, 사고 치는 것도, 금방 질려요. 남아 있는 기억이라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고, 심지어 뭔가 꿈을 꾸는 것도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얼마나 답답한데요. 나는 지금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도 혼자 한 게 없어요. 내가 8년 동안 이만큼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건, 결국 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었어요. 집에서 먹는 음식 대부분은 어머니가 싸다 주신 거고요.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나한테 쏘라는 말을 안 해요. 내가 어떻게 사는 지를 아니까. 심지어 저 집에 채워있는 가구도 전부다 하준이 형이 빌려준 것들 뿐이에요. 혼자 할 수 있는 거 저도 없어요. 나는 오히려 그 나이에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 차체가 부러운데. 난 진짜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돈만 모은 거거든요."
"하나도 위로가 안 돼. 그래 봤자 그쪽은 이미 내 나이를 지나갔고, 혼자 무엇인가를 이뤘고,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은 흘러요. 그 시간에 무엇을 채워갈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난 뭘 채워야 할지도 몰랐고, 뭘 채우고 싶은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걸 했어요. 그러니까 돈은 좀 남았지만, 아무런 추억도 없는 거죠. 지금 뭔가 힘들죠? 답답하고?"
"예..."
"나는 그 나이 때 힘들지 않았어요. 바라는 게 없었으니까. 그 나이에 힘들다는 것은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거잖아요.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꼰대 같아."
"아... 미안해요.."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고 있었고,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편해 보였다. 그냥 서로 말하지 않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강하준을 아주 많이 싫어해요."
" 아... 예..."
"아마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싫어할 거예요. 그래서 평생 이 사람을 저주하면서 살아야지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기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 많이 싫어하고 더 많이 저주하려고 강하준에 대해 찾아보고 찾아보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의 음악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정말 짜증 나게."
"하...."
나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는 전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나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더 싫어해야 하는데, 그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다고요. "
"뭐.. 트러스트 음악이 좋긴 하죠. 저도 학창 시절 내내 그것만 들었으니까.."
"거 봐요.. 그래서 더 짜증이 나요. 그 사람 음악을 비웃을 수 없는 게,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게.. 진짜 미치도록 짜증이 나요.... 내가 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은데, 내가 더 노래를 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심지어 이제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요. 그 사람 25살에 데뷔했거든요. 그 엄청난 앨범을 만들어서."
"아.. 가수구나...."
"아니에요!!"
그녀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수 아니에요. 전 아직 가수가 되지도 못했다고요!!"
그렇게 그녀는 내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원래 이 집에 온 것은 내 몸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 이유는 까맣게 잊은 채 나는 그녀에게 밥을 차려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식탁 건너편에서 티슈를 건네주기 위해 옆자리로 이동했을 때, 갑자기 현관문 소리가 났다.
"어?"
나는 순간,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생각했던 관계건 아니건 간에 이건 뭔가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도 전에 이미 하준이 형은 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