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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Aug 19. 2020

태어난 지 300일, 엄마 아빠 고생했어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그래서 너무 감사한 시간들.

 벌써 300일이 지났다. 어떻게 보면 참 빨리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하면 참 긴 시간이었기도 하다. 케이크를 사고 소소한 파티 물품들을 구매하면서 온전히 우리의 욕심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함께한 300일은  꼭 기념하고 싶었다.

 처음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장거리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운전을 하며 주말부터 속이 안 좋다는 아내가 병원에서 무슨 진단을 받았는지가 궁금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신했데. 산부인과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임신이래"

"에이~ 장난하지 마."

가끔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는 아내의 성격을 미루어보아 나는 분명히 장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계속 장난치듯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내의 어투로 나는 정말 100% 장난일 거라고 생각을 했고, 계속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아이가 생긴 것이었고, 그리고 이렇게 300일이 되었다.

 회사 후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이가 생기면 개인의 삶이 완전히 없어지잖아요. 그래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요즘 한참 서핑에 빠져있는 그 후배는 주말만 되면 바닷가에 가서 서핑을 즐긴다. 밤에는 같이 간 친구들이나 거기서 친해진 사람들과 즐거운 파티를 즐길 것이고, 그들의 젊음을 맘껏 누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결혼에 대한 생각과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그 후배는 결혼 후 아이에게 푹 빠져 사는 내가 참 신기하고 궁금했던 것이다.

"그냥 다른 세계야. 아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냥 다른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

 나도 결혼하기 전에는 좋아하는 취미들도 많았고, 친구들과의 모임도 즐겼다. 특히, 나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웬만하면 극장에서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보는 편이었다. 그래서 몇 년째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2군데의 VIP회원이었고, 무료 혜택으로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 이상의 소비를 하곤 했다. 그래서 심지어 신혼집에 TV 대신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설치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한 300일 동안 내가 본 영화는 손가락에 꼽는다. 그중에 당연히 극장에서 본 영화는 단 한편도 없고, 아이가 안방에서 자신의 방으로 잠자리를 옮기고 난 후에야 예전에 가지고 있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내가 아무리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영화는 아이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고, 세상에 그 어떤 재미있는 영화를 4D, IMAX로 본다고 해도, 내가 아이를 보는 것만큼 몰입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300일 동안 아이는 나의 가장 재미있는 취미생활이었고, 가장 좋은 친구였으며, 나의 모든 여가를 책임지는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다만,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300일 동안 정말 많이 행복했지만, 그만큼 너무 많이 힘들었다. 출산으로 망가진 몸으로 아이에게 모유를 주고, 시도 때도 없이 안아주어야 했던 아내와 그 아내를 바라보며 최대한 많은 것을 함께 하려고 했던 나의 시간들. 예방접종을 맞고 밤새 열이 올라서 잠도 못 자고 물수건으로 계속 닦아주어야 했던 날도 있었고, 얼굴에 열꽃이 잔뜩 피어서 볼 때마다 속상했던 날도 있었다. 잘 먹던 이유식을 갑자기 거부하기도 했고 , 잠을 자기 싫어서 내내 투정을 부리기도 하연서 아빠와 엄마의 진을 빼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시간들. 힘들었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서 우리의 300일을 만들었고, 그래서 이 300이라는 숫자를 우리가 기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의 시기를 모두 지나간 선배님들은 이런 나의 글들이 참 우습기도 하고, 가소롭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치열하게 지나온 우리는 스스로 대견하고 수고했다 말하고 싶다.


 지난 300일을 뒤돌아보며 가장 다행인 것은 정말 큰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것이다.  큰 사고나 크게 아픈 일도 없었고, (엄마, 아빠의 몸은 많이 아프지만 ㅎㅎ) 서로의 감정이 많이 상하거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도 없었고, 항상 서로 함께 기뻐하고, 서로 함께 응원하고, 서로 함께 도와주며 300일이라는 시간을 잘 채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300일은 앞으로 3,000일이 되고 30,000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커질수록 우리의 사이에는 더 많은 추억들과 더 많은 정이 쌓일 것이다. 부디 우리에게 남아있는 많은 시간들도 아무 일 없이 무사하게 채워지길 바란다. 지금처럼 주어진 시간 앞에서 서로를 도와가고 응원하며, 사랑하고 고마워하며, 소중한 시간들로 차곡차곡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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