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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Feb 23. 2021

딸아이의 이중생활

우리들의 비빌 언덕

"진짜 대박사건!"

 딸아이를 재우고 안방으로 가니 아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재우러 들어가기 전부터 통화를 한 것 같은데,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넘게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후 아내는 전화를 끊자마자 나에게 저렇게 말했다.

"진짜 충격적이야"

 그 전화통화 상대방은 지금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원장 선생님이었다. 늦은 시간에 이렇게 길게 전화 통화를 하게 된 계기는 안타깝게도 원장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사정이 있어서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워낙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우리가 믿고 계셨던 분이라, 아내는 아쉬운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에 길게 통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대화중에서 아내에게 "대박"이나 "충격"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은 다른 이유였다.

"우리 아이가 글쎄 어린이 집에서 여장부래. 제일 활발하게 노는데, 가끔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뺏어가기도 하고, 아이들을 밀면서 지지 않고 장난감을 차지하기도 한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당황했다. 아내와 나는 생각이 같아서, 이왕이면 뺏는 아이보다는 내어주는 아이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고, 친구들에게 양보하는 기쁨을 아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다만,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아내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절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씀하셔서 였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원래 소유욕이 강해지는 시기이고, 다른 아이에게 공격적인 성향일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니라, 그저 본인이 갖고 싶다는 표현을 강하게 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에겐 진짜 충격적인 것은, 집에서는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가족들의 입에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를 먹던 딸기를 먹던 엄마 아빠에게 먼저 가져다주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면 할머니 할아버지 입에 넣어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심지어 16개월이 빠른 처재네 조카가 한창 질투가 심한 시기여서, 우리 아이가 무엇이든 가지고 있으면 달려와서 뺏고, 가끔 밀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큰 반항 없이 당하고만 있고, 가끔은 언니가 무서워서 언니의 눈치를 보거나, 언니가 장난감을 뺐으러 다가오면 미리 내려놓고 도망치기도 한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상상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언니한테 당한걸 어린이집 가서 푸는 건가??"

"글쎄.. 근데 더 웃긴 건 치카뽀가도 그렇게 얌전하게 잘한데"

 이것도 충격이었다. 집에서 아이는 자기가 양치하는 걸 좋아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입에 물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가 안고 제대로 닦아주려고 하면 사약을 먹는 장희빈처럼 발버둥을 치며 거부하고 서럽게 울곤 한다. 그런 아이가 어린이집에서는 너무나 얌전하게 양치질을 잘한다는 것은 여장부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보통 이중생활이라고 그런데, 아이들이 집에서 하는 행동이랑 어린이집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경우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더한 아이들도 있다는 거지. 우리 아이가 좀 그런 편인 거 야. 선생님들끼리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에서는 제일 어리고 제일 작은데, 그중에서 가장 활달하고 적극적이어서 이런 성격인걸 부모님은 아시는지 궁금했다는 거야."

나는 이제 겨우 15개월인 우리 아이가 이중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과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 또 친구들 앞에서의 모습과 부모님 앞에서의 모습.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상황에 맞는 나의 모습들이 나오는 것이고, 가끔은 나의 필요에 따라,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들이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는 보통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은 솔직하다고 여기는데, 그런 아이들마저도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을 하고, 대상과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아이가 집에서만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아이에게 우리가 비빌 언덕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떼를 써도, 안아달라 뽀뽀해달라고 애교를 펴도, 간혹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모두 다 받아주고 변함없이 내편이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 나에게 부모가 그런 존재라는 인식이 아이에게 벌써 생긴 것이 수도 있다. 나는 부모의 역할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작 15개월짜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자신만의 세계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오로지 내편만 들어주는 든든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아이가 자신의 세상에서 당당히 맞서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항상 비빌 언덕은 있었다. 내 속의 감정을 좀 거칠게 표현해도 받아주는 존재들. 내가 힘들고 지칠 때, 투덜거리면서도 찾게 되는 존재들. 그들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위로가 되는 존재들.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그저 누군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비빌 언덕이 우리를 우리답게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절대 그 존재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자주 만나고 연락하고 표현하면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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