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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Aug 04. 2021

"엄마는 그 자리에 앉아서 곰돌이 젤리 주던데?"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나름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었고, 대학교 때는 학원도 좀 다녔었다. 게다가 대학원 준비를 위해 중학교 영어 교과서부터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물론,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쉽게도 어디 가서 자신 있게 영어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이걸 뜻하는 단어부터 머릿속에서 찾아내고, 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고, 그래서 나의 생각을 오류 없이 전달하기 위해 입으로 말을 하고, 또 상대방의 대답을 오해 없이 잘 이해하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계속 반복되고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지금 그 언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 번 해 준 말은 다 기억하고 있는 듯하고, 본인이 필요한 순간에 아주 적절하게 잘 조합해서 표현해 내고 있다.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그저 겨우 단어만 따라 하고, 그마저도 자기가 말하지 못하는 단어는 말을 하지 못하고는 했다. 그러다 점점 말을 할 수 있는 단어들이 늘어나고, 문장으로 해준 말들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본인이 직접 구성해서 하는 단계까지 왔다.


다 같이 과자를 먹는 자리에서 과자를 하나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빙빙 돌리면서


"누구한테 줄까요?"


라고 말하기도 하고, 늦은 저녁 차를 타고 오다가, 잘 보이던 달이 방향이 달라져서 안보이니


"달 없어졌어. 달 보고 싶어."


라고 말하기도 하고, 엄마가 요리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조금 돕는 과정을 하나 시켰더니, 그 뒤에 장난감 전화기를 들고,


"할머니 빨리 오세요. 내가 만들었어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풀린 신발끈을 매려고 하자, 옆에 쪼그려 앉아서


"아빠 괜찮아? 내가 해줄까?"


 라고 하기도 했다.  저런 말들을 할 때마다 아내와 나는 정말 빵 터지고 웃곤 했는데, 그 표현을 또 들었는지 어느 날에는


"엄마 빵 터졌어."


라는 말도 했다. 아이가 이렇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 때마다, 놀랍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면은 어김없이 아이의 그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돈다. 마치 수능 금지곡처럼. (아마 지금 시점에 우리가 수능을 본다면 100% 실패하리라 본다.)

 

 최근에 아이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어린이집 방학기간 동안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해서 아이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러 다녀올 때 있었던 일이다. 하루 종일 할머니 집에서 놀다가 늦은 시간에 차를 타고 집에 오는데, 아이가 앞자리에 타고 계신 할머니에게 자꾸 곰돌이 젤리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양치까지 다 하고 자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젤리 없어요. 내일 먹어요."


"어? 엄마는 그 자리에서 곰돌이 젤리 주던데?"


 어머니랑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내는 가끔 아이가 차에서 땡깡을 부릴 때 앞자리 서랍에 넣어둔 곰돌이 젤리를 주곤 했다. 아이는 그 상황을 모두 기억하고 앞자리에 계신 할머니에게 곰돌이 젤리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번은 단순하게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고작 21개월을 살아온 아이가, 그리고 이제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 지 1~2달 밖에 안된 아이가 정확한 문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농담으로 말로 먹고살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직장에서는 교육팀장으로 성인 교육을 기획하고 강의하고 있고, 브런치에서는 다양한 글로 나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나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얘기한다.


"니 딸인데 당연히 말을 잘하겠지."


 물론, 어쩌면 나의 성향이 아이에게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 시기에 나는 그 정로 말을 잘하거나 빠른 아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나와 닮았다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요즘 아이들이 언어 습득이 빠른 것이고, 우리 아이도 요즘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용인 것이다.  내가 요즘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말과 함께 나누는 대화가 아이에게 그대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즉, 매일매일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주는 말들과 자신의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말들이 아이에게는 다 예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자라면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에게 제일 잘 배운 것은 언어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혀 욕이나 비속어를 쓰지 않으시는 분들이셨다. 화가 나시면 감정이 격해지고, 목소리가 커질지언정, 소위 말하는 막말이나, 욕을 하시는 일은 절대 없으셨고,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그래서 내 기억에는 청소년기의 누나들도 절대 그런 말들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누나들은 내가 언젠가 학교에서 또래들에게 비속어를 배워 왔을 때, 아주 크게 나무랐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린 시절에 욕은 쓰면 경찰이 잡아가는 범법행위였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도 좋은 말만 알려주고 싶다. 다양한 종류에 긍정적인 표현들과 자신의 감정을 욕을 하지 않아도 전달 수 있는 많은 어휘들을 물려주고 싶다. 그리고 충분히 남들을 기분 좋게 하는 이쁜 말들만 하며 살아가는 아이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더 아이에게 좋은 말만 쓰는 수다쟁이 아빠가 되어가고 있고, 오랫동안 아이와 떠드는 이쁜 말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정말 스펀지처럼 세상의 모든 말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아이가 나중에는 또 어떤 말들로 우리를 기쁘게 할지 점점 더 설레고 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설렘이 많은 선배들이 말하는 평생의 효도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 평생의 효도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오늘도 빨리 퇴근하고 달려가서 우리 아이와 실컷 수다를 떨어야겠다. 오늘 아침에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아빠 다녀오세요. 아빠 빨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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