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2
장인은 순간적으로 그 외국인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아내가 그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아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자! 이거 먹어요."
"감사합니다."
그 외국인은 허겁지겁 맥주캔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그에게 견과류 접시도 내밀었다.
"안주도 먹어요. 배는 안고파요?"
"아 괜찮아요."
맥주 한 캔을 게눈 감추듯이 마셔버린 외국인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장인도 마음이 좀 약해지는 듯했다. 장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서 왔어?"
"필.. 리핀에서 왔어.. 요."
"얼마나 됐어? 여기 온 지."
"1년 좀 넘었... 넘었어요."
"뭐하러 여기까지 와. 고향에 있지."
"고... 고향?"
"그냥 필리핀에 있지 왜 왔냐고? 먼데."
장인은 아마 문득 그 외국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쳤는지 모르겠다. 그 역시 젊은 시절, 중동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모를까? 장인은 물어보긴 했지만, 누구보다 그 질문의 대답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 위해, 한 번에 큰 목돈을 좀 만들어보려고. 당장이야 몸도 마음도 더 힘들겠지만, 그 몇 년의 고생이 가족에게는 또 다른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기꺼이 먼길을 떠났던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나 공부 더 하려고."
그런데 그의 대답은 장인이 생각하던 그런 종류의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인은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누구 공부시킨다고?"
"나 공부하고 싶어서. 나. 나.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문득 어두워서 잘 인지하지 못했던 그의 외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흔한 동남아 남자들처럼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외모와 그의 눈빛은 여행에 가서 만났던 흔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 공부를 잘하나 보네. 그렇게 보니 좀 똑똑해 보이기도 해요."
"뭔 또 쓸데없는 소리야."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아내가 먼저 말해버리자, 자신도 모르게 욱하게 됐다.
"나 의대 다녀요."
"뭐?"
아내와 투닥거리는 사이에 들려온 그 외국인의 말에 장인은 또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의사 되려고.. 공부한다고요.."
"우와. 대단하다. 공부 진짜 잘했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아? 거기서는 아무나 다 시켜주는 건지."
"그거 차별이에요. 우리보다 조금 못 사는 나라라고 막 무시하고 그러는 아니에요.
원래 안 그러는 사람이 오늘따라 왜 그래요?"
아내의 말이 자신의 마음속을 읽는다고 느꼈는지, 장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화낼 일이 아니다. 필리핀에서 의대에 다니는 청년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다. 아마 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모을 것이고, 그래서 최대한 빨리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 꿈을 이루고 싶을 것이다. 그 사실이 문제가 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한 거지. 어?
"최선을 다해 돈을 모으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고 싶다."
문득, 그 생각에 장인은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동으로 일을 하러 갔을 때, 그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3년 동안 5000만 원을 모아서 돌아오자! 하지만 그곳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고, 몸과 마음을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이루고 마는 성격인 그는 포기보다는 오히려 더 폭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다른 직원들이 꺼리는 힘든 업무를 다 도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야근을 하는 것도, 주말에 추가 근무를 하는 것도 항상 먼저 지원했다. 그에게는 주말마다 쇼핑을 다니는 동료들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서 무엇인가 쉴 곳을 찾을 때, 그는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그는 3년의 계획에서 8개월이나 당겨서 본인이 목표한 목돈을 만들어서 귀국했고, 심지어 그에 손에는 가족들을 위한 고가의 선물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그가 4달이나 기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현지인 현장감독의 눈에 들어서 였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뛰어들던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현장감독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작업에 장인을 끌여들였다. 장인은 아직도 본인이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밤에 따로 장인을 불러서 시켰던 일들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안다. 장인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 2달 동안 그 현장감독의 비밀스러운 호출에 응했다. 결국 4 달이라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사줄 수도 있었다.
장인이 지금 이 순간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은 저 외국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현장감독의 호출을 받은 건 장인만은 아니었다. 매일 밤 7명의 인원이 그의 지시에 따라 물건을 옮기는 일을 했는데, 그 현장감독이 주던 돈이 원래 받던 임금의 두배가 넘었기 때문에, 그 7명의 인부들은 모두 신나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쉽게 많은 돈을 벌다 보니 그들의 허영심도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인부들 중에 장인을 제외한 6명은 모두 시간만 되면 쇼핑을 다니기 시작했고, 호출이 없는 날에는 그들끼리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돈은 어느새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금세 또 벌 수 있다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인은 달랐다. 그에게 그 돈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고, 한 번의 호출이 그의 귀국을 이틀씩 앞당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안 좋은 일임을 알면서도 참 열심히 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다.
"그래서 학비는 다 모았어?"
"아. 아직 모자라. 의대 돈 많이 들어가요."
장인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간절하다. 그런 그의 마음은 흔히 우리가 만나는 동남아 외국인과는 달랐다. 그래서 장인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자신의 상황에서 가장 빨리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일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일은 직접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서 돈을 많이 주는 일을 찾아다녔을 것이고, 그렇게 그놈을 만났을 것이고, 이제는 그놈 밑에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는 돈만 모아서 떠나면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이 흐르다 보니, 장인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묻고 있던 그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인의 등에는 한줄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장하네. 먼 곳까지 와서. 뭐 더 줄까요?"
"아니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가! 빨리 가. 이제."
"아.. 고맙습니다."
그는 다시 주춤거리며 그들의 밭으로 사라졌고, 장인은 그가 가는 방향을 주먹을 꼭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아까의 일을 물어볼까도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장인은 지금 그에게 무엇인가를 추궁하는 것이 그를 더 궁지에 모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바로 이어서 든 생각은 그가 여기에 왜 왔냐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확인이나 혹은 압박을 주기 위해 저 어둠을 뚫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들이 장인의 등줄기를 점점 더 적시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온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발을 뗄 수 없었다.
"뭐해요. 들어가요. 시간이 늦었다면서."
아내는 계속 툴툴거렸던 장인에게 심통이 났는지, 말을 살짝 비틀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 장인에게 아내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인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고, 심장은 귀 옆에 붙어있는 것처럼 큰소리로 뛰고 있었다.
"어?"
그 순간, 묵묵히 밭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뒤돌아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장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맑아 달빛이 유난히 밝은 하늘은 멀리 있어서 서로의 표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장인은 무엇인가를 먼저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릴 뿐. 잠시 후 그는 씨익 웃고는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밭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그는 아주 빠르게 사라졌고, 여전히 장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온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도 장인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긴장이 풀리자, 조기 축구를 두 게임 연속으로 뛰었을 때나 느낄 수 있었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좀비처럼 잠자리에 들어간 장인은 그 피곤한 몸으로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고, 그의 머릿속에는 그 외국인의 마지막 미소가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
장인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잠에서 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5시만 돼도 눈이 떠지던 그는 아침 10시가 넘어서 손녀들이 그의 침대로 뛰어들었을 때야 겨우 눈을 뜬 것이다.
"아빠 웬일이야? 늦잠을 다 자고?"
"그러니까. 별일이야."
손녀들의 애정공세로 겨우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어제 일들은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띵하게 머리를 옥죄는 두통은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제의 일이 스트레스 때문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저도 왔어요."
그때, 딸들의 얼굴 뒤로 두 사위의 얼굴이 빼꼼히 나왔다. 장인은 순간,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와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저들밖에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