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3
설록과 완수는 과수원에 오면 장인어른의 일부터 돕는다. 그리 크지 않은 포도밭이긴 하지만, 그곳을 장인 혼자 꾸려나가다 보니 여간 일손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틈만 나면 와서 도와주곤 하는데, 그중에도 건장한 사위들의 힘은 장인에게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아버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아. 그럼 와서 이것 좀 같이 하자."
오늘은 포도밭 위로 설치해놓은 비닐을 보수하는 일이다. 비닐하우스처럼 전체를 씌운 것이 아니라 비가 맞지 않게 지붕만 만들어 놓은 것이라, 아무래도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날리거나 찢어지기 마련이다. 장인은 사위들이 온 김에 후드득 이일들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다.
농사일은 간단한 것이 없다. 장인의 입장에서 얼마 안 되는 일이라도, 막상 하다 보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오늘은 정말 일거리 많지 않아서 1시간 만에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일거리가 정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장인이 무엇인가 상의 가 할 것이 있어서 일을 더 만들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 것은 분명했다.
"맥주나 한잔 하자."
일을 끝내고 장인은 사위들을 원두막으로 불렀다. 장모는 일이 끝나는 시간을 대충 맞춰서 시원한 맥주와 간식거리를 내왔다. 아내들은 아이들을 봐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있었고, 장모도 식사 준비에 새참만 내어주고는 바로 들어가 버렸다. 세명의 남자들이 모두 원했던 자리가 마련되었다.
원두막에 평소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저 더위와 목마름을 핑계로 시원한 맥주나 서로 나누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선록이었다.
"아버지. 부르셨다고 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 그게 별거는 아니고, 저기 말이야 저기."
"아. 저 밭이요? 아직도 뭘 많이 묻어요?"
"제가 그래도 꾸준히 민원을 넣고 있기는 해요. 와서 조사한다고는 하던데요."
"근데 그 조사가 문제가 아니야. 더 심각한 뭔가가 있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장인은 아무도 없는 원두막에서 주위를 살피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 밭에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하나 있는데, 그놈이 키도 작고 말라서 매가리도 없어 보이거든. 근데 그놈에 어젯밤에 혼자 저 밭에 왔더라고."
"밤에요? 혼자서요?"
"아! 혼자는 아니고, 그러니까 그 주인 놈이랑 같이 말고, 그놈만 따로 와서 다름 사람이랑 뭘 또 묻더라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정신이 없어서 정리가 안되네. 그러니까, 저 밭에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하나 있는데, 아! 아니다. 이렇게 말해줄게. 어젯밤에 내가 잠깐 포도밭에 물을 끄려고 나왔는데, 저쪽 밭에 뭔 차가 또 들어오는 거야. 근데 그게 평소처럼 덤프트럭들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웬 냉동탑차가 들어오는 거지!"
"예? 냉동탑차요?"
순간, 선록은 냉동탑차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실은 지금 장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봤던 냉동탑차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장인의 입에서 냉동탑차 이야기가 나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자신이 봤던 냉동탑차와 장인이 본 냉동탑차가 같은 차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냉동탑차가 여기 왜 와?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근데 그 차가 들어왔는데, 옆에 보니까 그 외국인 놈이 혼자 서 있더라고. 보니까 그놈은 먼저 와서 땅을 파놓은 것 같아. 내가 그 전일은 몰라도, 주위에 포클레인도 없었고 한 거 보니까. 그 차가 오기 전에 그놈이 와서 먼저 삽으로 땅을 파놓은 거 같아 아무래도. 어차피 수시로 뒤엎던 땅이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거고."
"그래서요?"
"어 여하튼 그래서 그 탑차에서 그놈이 뭔가 사람만 한 짐을 하나 꺼내서 땅에 묻더라고 멀리서 봐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쌀 포대기 같은 걸로 꽁꽁 싸놓은 것 같은 거야. 뭐 여하튼, 처음에야 나도 저 놈들 또 뭐 못된 짓 하나보다 하고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뭔가 찝찝하더라고, 그래서 좀 지켜봤는데."
"뭐가 더 있었어요?"
"아니 그놈도 날 봤는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그러더니 다 묻고 나서는 우리 집으로 와서 나한테 맥주를 달라는 거지. 목이 마르다고!"
"예? 그놈이 여기를 왔다고요? 아버지가 보고 있는 걸 알고요?"
"그건 모르지 내가 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하튼, 어젯밤에 갑자기 그놈이 확 나타나는데, 정신이 없더라고."
"그런데 아버지! 그 탑차는 잘 보셨어요? 혹시 여기서 번호도 보이나요?"
"차 번호를 어떻게 봐. 이 나이에, 여기서 보인다고 해도 나는 못 보지!"
"아. 그렇죠.. 근데 다른 건 몰라도 멀리서 봐도 좀 낡아 보이긴 했는데, 뒤 문에 커다란 눈알을 붙여놨더라고."
"눈알이요?"
"아니, 그 눈 모양 스티커! 가끔 트럭이나 그런데 붙어놓는 거 있잖아. 그게 눈에 딱 들어오긴 했어. 빛 반사가 되는 스티컨지는 몰라도."
선록은 눈 스티커 이야기를 듣고, 기운이 좀 빠졌다. 장인의 말을 한참 들었을 때는 그 차가 자신이 본 차랑 같은 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스티커는 자신이 본 차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록의 관심이 좀 사그라드는 것 같아 보이자 장인은 뭐가 조급한지 갑자기 말을 더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놈이 보통 놈이 아니더라고. 글쎄 그놈이 의대생이래. 외국인 노동자라 대충 막일이나 하던 놈인 줄 알았는데, 필리핀에서 의대를 다니는데, 학비를 벌려고 넘어왔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까지 하고 생각해보니까 그게 더 섬짓해! 그런 놈들은 왠지 지 목표를 이루려면 앞뒤안 가리고 기를 쓸 거 같거든!"
선록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한 이 말에 완수의 관심이 더 높아졌다. 완수는 그 불륜남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의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완수가 조사한 결과 그 불륜남은 옆 신도시에서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3명의 의사가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시간도 얼마든지 낼 수가 있었고, 그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소아과라서 돈도 잘 버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즉, 그 불륜남이 몇 다리나 걸치면서 그런 수작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의사라는 안정적인 고소득 직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이유로 완수는 장인이 말하는 그 외국인 노동자가 의대생이라는 말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그 놈들이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근데 이걸 경찰에 신고해도 될지 몰라서 말이야."
"이게 좀 애매하긴 할 것 같긴 해요. 무작성 신고를 하자니 다 추측이나 심증일 뿐이고요. 증거가 없거든요. 괜히, 엄한 사람 괴롭히는 게 아닌가도 싶고. 그런데 또 막상 이걸 그냥 넘어가자니 너무 찝찝하거든요. 혹시라도 이게 진짜 무슨 큰 사건이면, 뭔가 내가 막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요. 게다가 이게 진짜 큰 사건이면, 절대 누군가 혼자 벌 인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나섰다가 우리 가족들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요."
"아니 형님은 어떻게 장인어른 마음을 그렇게 잘 아세요?"
"그러니까. 박서방 말하는데 나 소름 돋았어. 내 속에 들어온 줄 알고."
"아 그게 실은요. 저도 비슷한 고민이 있어서 다들 뵙자고 한 거거든요."
설록도 장인과 완수에게 자신이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두 다 지금 불안한 일을 겪고 있어서 그런지, 절대 흘려듣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서로 동조하며, 설록이 가지고 있는 의심들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장인도 자신이 본 냉동탑차와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두 차가 같은 차야. 분명해! 내 느낌이 그래!"
"아니 아버지. 그래도 그 스티커가 없었어요. 그 차는."
"자네가 그 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저요? 3일 전이요."
"아니 3일이면 그깟 스티커 하나 못 붙일까? 그거 아무 데서나 다 파는 건데? 자네 어디 사는지 안다고 했지? 그럼 우선 다시 확인부터 해봐. 스티커가 있나 없나!"
"아.. 예.. 근데.. 제가 혹시라도 절 알아보면, 제가 계속 의심한다고 생각할까 봐요.."
"그래? 그럼 거긴 내가 가볼게. 그러면 되지."
"예 감사합니다."
"잘됬어! 이번 참에 저놈의 새끼들을 싹 다 넣어버려 야지!
"저.. 근데 저도 할 말이 좀 있어요."
"뭔데?"
"저도 요즘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완수도 설록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앞에 두 사건에 비해, 불륜은 그 무게감이 달랐지만, 역시 그들도 완수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움찔거렸다. 각자의 다른 사건이 우연히 이 세 사람에게 다가왔지만, 뭔가 이상하게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은 고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들이 말하는 모든 일들에 단 하나의 확신도 없다. 모두 각자의 추측들이고, 오해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뭔가 커다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져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볼 때, 그 의사 놈도 뭔가 구린 게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대범하게 미친 짓을 벌일 수가 없거든. 보면 꼭 사고 치고 깜빵 가는 놈들이 지 집에도 몹쓸 짓을 해놓는단 말이야. 그렇게 기본적인 도덕성이 없는 놈들은 다른 나쁜 짓을 했을 가능성도 높아."
"그럼 장인어른 이렇게 하시죠! 제가 꾸준히 구청에 민원을 넣고 있었으니까. 제가 저 밭은 신고를 한번 해볼게요. 장인어른이 나서시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 같아서요. 제가 그동안 민원 넣으면서도 여기 사위라는 말 안 해서 괜찮을 거예요. 대신 형님이 그 불륜 놈 쪽을 좀 맡아주시는 게 어때요? 대충 거래만 몇 번 더 해봐도 좋을 것 같은 데요."
"어 좋아! 어차피 이쪽 차는 아버지가 알아봐 주시기로 했으니까. 거기는 내가 알아볼게."
"어! 우선 내가 이따가 탑차부터 확인하고, 용식이가 그 폐공장 쪽에 아는 사람이 좀 있으니까. 내가 그쪽도 좀 알아볼게."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나눠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장인 : 선록의 냉동탑차의 눈 스티커를 확인, 폐공장의 현재 상태와 소유주 확인
선록 : 완수의 불륜남 조사(당근 마켓 거래 내역 및 소아과 운영 상태 조사)
완수 : 건너편 밭 민원 접수 및 외국인 노동자 신고 조치
신기했다. 세명에게 비슷한 시기에 범상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했고, 서로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제일 중요한 것은 모두가 찜찜한 일들을 겪고 있다 보니, 상대방들의 상황들도 훨씬 더 몰입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들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존재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듯이 쓸데없는 헛짓거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정말 아무런 사건사고도 없이 살아온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이든 하나라도 실제 사건으로 이어진다면 너무나도 엄청난 파장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모른척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도 역시 지금까지의 삶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어떤 나쁜 일들도 직접적으로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서, 모두들 혹시라도 자신들의 주저함으로 인해 더 큰일이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그들의 어설픈 수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