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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Feb 13. 2020

의사결정권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없다

 팀장이 되고 나서 제일 크게 달라진 것은 바로 의사결정권이었다. 업무의 진행에 있어 나의 의견이 적극 반영되어 내가 결정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물론 팀원이었을 때에도 기획업무나 지시사항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반영하고 주도적으로 의견을 표하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의사 결정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도 나의 생각으로 거부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아직은 팀장 나부랭이라서 내가 소신껏 결정한 사항이 나보다 높은 직책자들에게 물먹는 경우도 많고, 후배들의 의견에 다른 결정을 내렸던 것들이 안 좋은 결과를 만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의사결정권이 생겼던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팀원이었을 때는 나의 업무가 더 중심이었고, 나의 성과가 우선이었다. 일에 대한 책임도 의사결정권자에게 있으니 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만한 것들은 직책자에게 미루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의사 결정자라는 것은 책임도 져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폼나게 결재를 해주고 가끔 서류를 던지는 드라마 같은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재함에 있어 이 결정을 통해 발생할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팀장을 달고 나서는 더 다른 업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고, 다른 부서나 회사 정책에 대한 부분도 더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단순히 내 업무만 보던 시각이 부서 간의 업무 연관성까지 고려하여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더 넓어졌다는 말이다. 심지어 내가 더 업무를 꼼꼼하게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 내가 핑계될 수 없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결정으로 업무가 진행되어지는 데 그 결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은 명확하게 나에게 있다. 그 상황에서는 나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결국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절대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다. 우리의 삶에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나온 그 수많은 선택들의 중심에 본인이 있었는가?
혹시 누군가의 의견이나 가볍게 던지는 참견이나 보이는 시선들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지금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많은 고민을 한다. 그리고 내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 상황이 되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묻는다. 심지어 인터넷이나 모바일 환경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도 의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조언을 얻어 선택을 한 결과가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경우들이 발생한다. 내 딴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는 이유는 그 조언의 깊이가 그렇게 깊지 않기 때문이다.
 조언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그 사안에 대하여 그렇게 깊게 고민할 필요도 진지하게 대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내 주변 지인들의 경우 같은 상황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결정했던 경험들이 있어서 그에 따른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물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육아에 있어 맘 카페의 역할이 그러하다.) 다만 아무리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고민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변수가 같을 수는 없기에 같은 선택이 같은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조언은 참고사항일 뿐이지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다만, 여기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의 조언이나 의견을 다른 얘기다. 그들은 관련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말에 책임이 따른다.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는 당연한 것이지만,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무료상담이라고 해도 그들이 권위를 통해 조언을 하는 경우는 도의적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내 주변에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 업을 하는 사람에게 받는 조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조언에 대해 너무 신뢰하거나 의지해서는 안되다는 말이다. 특히, 인터넷이나 모바일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한다. 대부분의 온라인상의 질문이나 고민 상담을 하는 경우 나의 상황이나 배경 환경을 모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편적으로 편집해서 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들 역시 그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즉답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질문을 하고 답변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왔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의 나의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정보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른 일을 하다가 그때 시간이 나서 대답을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 심지어 그 답을 달아주는 대상에 대한 정보가 오픈되어 있지 않거나 그들의 정보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그들의 말에 큰 무게감을 뒤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내 인생의 의사결정권은 오로지 나에게만 있으며, 그래서 책임마저도 온전히 나에게만 있는 것이다. 미성년자인 경우 법적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부모님이나 혹은 부모와 같은 존재가 우리의 많은 것들을 선택해주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법적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암묵적인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르게 훨씬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누가 뭐라 해도 내 삶의 의사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선택의 순간마다 스스로 잘 고민하고 선택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남들도 다 그게 좋다고 하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데 뭐"
"무난하게 사는 게 제일 좋지 뭐"
"인생 뭐 있어? 대충 평범하게 살다 가는 거지 뭐"

내 인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싫어서, 남들과는 다르게 살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노력을 하는 게 겁나서 마음속으로는 다른 모습들이 꿈틀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밋밋하게 살아가기로 결정해 버린 삶은 나중에 누구에게 어떤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 의사 결정권은 내가 죽기 전까지 오직 우리에게만 있다.

"결혼을 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지"
"늙으신 부모님을 위해 어쩔 수 없잖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뭘 새삼스레"

잊지 마라. 저 핑계들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어쩌고 싶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없다. 결국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지금이라도 나의 의사결정권을 잘 사용하기 바란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라면 자신감을 갖어도 좋다. 그리고 자신감까지 얻는 후회 없는 선택은 그 과정마저도 즐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비록 좋지 않더라도 내가 한 선택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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