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수-4
완수는 제일 먼저 시청에 가보기로 했다. 장인어른이 부탁하셔서 전화로 몇 번 민원을 넣은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팀장에게 일이 있다고 잠시 외출 허락을 받고 나온 완수는 바로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의 민원실에는 다행히도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자는 40대 초반의 남자였는데, 이미 영혼이 없어 보이는 표정과 눈빛을 띄고 있었다.
"아. 일전에도 전화로 몇 번 전화를 주셨던 분이시죠?"
"예. 맞습니다."
"아. 혹시 인근에 거주하고 계시거나, 근처 어르신들의 자녀분 되시나요?"
"예? 그걸 왜 묻죠?"
"그거야 뭐. 그 동네가 원체 선생님처럼 젊은 분들은 거의 안 계시는 동네라서요. 보통은 어르신들이 자녀분들께 그렇게 한탄을 하시면, 마지못해 자녀분들께서 전화를 주시곤 하거든요. 그래서요..."
"그래서요?"
"예?"
"그래서요? 그게 뭐 문제가 됩니까?"
"아...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고요."
"어르신들이 한탄이나 하시는 말씀이니, 대충 처리하시고 넘어간다는 겁니까? 그동안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차피 자식들도 귀찮아서 대충 하는 액션이니 금세 넘어갈 거라 생각해서요?"
"아니요.. 선생님.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요? 그럼 지금 거기는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데요? 직접 가서 좀 파보기라도 했습니까?"
"저 선생님. 그게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그게 맘대로 막 그렇게 땅을 파보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도 엄연한 사유지라서 정당한 사유와 절차가 아니면 맘대로 수색할 수가 없다고요."
"정당한 사유와 절차라고 한다면, 결국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라는 말로 들리네요. 맞습니까?"
"아니 또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요."
"우선 저는 지금 이길로 나가서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신고를 할게요. 아. 그리 지역 토지 사용에 대한 관리감독 의무가 있는 시청을 대상으로 직무유기 및 근무태만에 대한 민원도 좀 넣어볼 생각이고요. 말씀해주신 정당한 사유와 절차를 제가 잘 만들어서 진행해보겠습니다."
"저.. 선생님... 잠시만요."
"왜요?, 뭐요?"
"우선 저희한테도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제가 꼭 직접 확인해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요? 또 이래 놓고 세월아 네월아 할 거 아닙니까?"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내일까지는 꼭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되지요?"
"내일까지요?"
"예! 내일까지요."
"예 우선 알겠습니다. 그럼 믿어보겠습니다. 꼭 연락 주십시오."
완수는 우선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해당 공무원들이 그곳의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선 그가 이 짧은 방문으로 확인한 것은 그곳의 민원을 넣은 것이 본인만은 아니라는 점과, 시청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제 좀 다를 것이다. 우선 완수는 자신의 행동으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공무원들에게 또라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주었고, 그렇다면 그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그 공무원이 나오면서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고 내일까지는 꼭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 반듯이 움직일 것이다. 그래서 완수는 나오자마자 시청의 입구가 잘 보이는 곳으로 차를 옮기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본인이라면 바로 나와서 그곳에 가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근무시간에 잠시 나온 것이기에 1시간만 딱 기다려보고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은커녕 10분도 되기 전에 완수와 이야기했던 담당자가 주차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짜증과 귀찮음이 잔뜩 섞인 얼굴로 차에 올랐다. 완수는 조용히 시동을 켜고 그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연히 과수원 쪽으로 향했다. 과수원 근처에 다다른 그들은 그놈의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외길로 들어섰다. 완수는 순간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말 그대로 외길이라 완수의 차가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과수원으로 들어가기에는 서로가 너무 잘 보이는 위치이기도 하고, 우리 과수원과 그 밭은 시야는 좋지만 거리가 멀어서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완수는 조금은 더 멀지만 차를 대고 숨을 수 있는 야산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 밭의 오른쪽에 있는 야산은 들어가는 길이 야산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차로 10분은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더라도 다시 차를 대고 15분은 더 걸어 올라가야 그 밭이 보이는 곳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서둘러도 25분 후에나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완수는 우선 지금의 상황에서 회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차를 그 방향으로 틀자마자 팀장에게 전화해서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복귀가 어렵다고, 반차 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
완수는 산 뒤쪽에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벗고 차에 있던 운동화로 갈아 신은 뒤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완수가 그나마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도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공무원들의 특성들 때문이다. 완수의 회사에도 각종 점검과 관리를 이유로 담당 공무원들이 방문하고는 하는데, 주로 그들의 스케줄이라는 것이, 방문을 해서 책임자들과 차를 한잔 마시고, 담당자들과 담배를 한대 핀 후에, 어슬렁거리며 본인들이 확인해야 할 곳을 둘러본 뒤 식사를 하러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시간이 딱 맞다. 아마 지금 쯤이면 밭주인이 타주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쓸데없는 안부를 묻고 있을 것이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노고를 지루하게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발은 서둘러서 뛰어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초초하지 않았다. 완수의 예상이 맞다면 그들은 지금부터 30분은 더 앉아서 노가리를 까고 있을 것이고, 그때서야 형식적으로 과수원을 좀 둘러본 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는 밭주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완수가 땀을 흘리며 밭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역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과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비닐하우스가 있는 쪽에서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비닐하우수 뒤쪽 창고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완수는 우선 커다란 나무 뒤로 자리를 잡고, 몸을 숨겼다. 거의 30분이나 돌아서 이곳으로 온 것이지만, 확실히 이곳은 장인어른의 과수원보다도 거리도 가깝고 시야도 좋았다. 심지어 몸을 숨길 수 있는 커다란 밤나무와 도토리나무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느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이기는 했지만, 야산에 있는 밤나무 근처다 보니 모기의 공격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들을 보느라 모기를 쫓을 수 있는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땀냄새가 풀풀 나는 그는 모기에게 꽤 많은 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때, 그들이 비닐하우스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간은 4시 50분. 아마도 대충 땅을 살피는 척하고, 식사를 하러 갈 요량일 것이다. 완수는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물어대는 모기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면서 문제의 장소로 걸어 나오는 그들의 뒤에는 멀리 서봐도 눈에 확 들어올 만큼 덩치가 큰 밭주인과 상대적으로 외소해 보이는 그 외국인 노동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점점 완수와 가까워지자 조금씩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골치 아파요. 우선은 민원이 들어오면 어떻게든 확인은 해봐야 하니까요."
"그럼요. 그러시겠죠? 그런데 뭐 보시다시피 뭐가 없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조건 귀농을 하겠다고, 덜컥 땅만 빌려놓고 내려와 보니 뭘 할지도 몰라서 몇 년째 이렇게 놀리고 있거든요."
"그러니까요. 사장님도 뭔가를 빨리 하셔야 동네에서 뒷말이 좀 안 나오죠. 안 그래요?"
"맞습니다. 안 그래도 내년에는 뭐라도 좀 꼭 해보려고 합니다."
"근데 왜 자꾸 땅은 파고 그러신데요. 이거는 지금 봐도 뒤엎은 지 얼마 안 되는 돼요?"
"아. 그것도요. 하도 제가 땅을 놀리니까. 누가 뭘 심지는 않아도, 땅은 자꾸 뒤집어야 잡초도 안 자라고 비옥해진다고 해서요. 그나마 나름 관리한다고, 생고생을 하고 있던 건데, 그게 엉뚱한 오해가 됐나 봅니다. "
"아 또 그렇죠? 맞아요. 그런 땅은 며칠만 그냥 둬도 금방 잡초밭이 되니까... 잠깐만요.."
그때 무심히 땅을 보며 말하던 그 민원담당자 공무원이 말없이 밭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요? 어디 가세요?"
갑작스러운 공무원의 행동에 과수원 주인은 갑자기 당황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무원은 밭주인의 질문에 답도 하지 않은 채 본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빠르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던 완수에게는 더 이상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외국인 노동자였다. 어쩌면 본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수 있는데도, 완수가 보기에는 밭주인보다 훨씬 더 당황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완수의 시선에는 커다란 사장의 몸집에 가려서 잘 안보일 만도 한데 눈에 띄게 당황한 그 노동자는 커다란 주인의 몸 뒤로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완수의 시선에서는 운동회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건 뭐예요?"
빠르게 밥의 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민원 공무원은 자신의 구두가 엉망이 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땅에서 조금 드러나 있는 비닐 포장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완수가 본 그 상황은 밭주인도 의아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밭주인은 그 공무원이 절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가 묻는 것들은 보통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덤프트럭으로 쏟아낸 뒤에 다시 포클레인으로 덮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삽을 들고 와도 쉽게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걱정되는 것은 냄새 정도였을 것이다. 아무리 포클레인이라도 냄새까지 모두 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라도 공무원이 무슨 냄새라도 맡고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을 했을 텐데, 그가 겨우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작은 비닐 조각인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이제 걱정보다는 황당함만 남았을 것이다.
"글쎄요? 저도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밭주인은 정말 그것이 뭔지 궁금한 사람처럼 그 비닐 조각을 잡아당겼고, 그 비닐 조각은 생각보다 길게 딸려 나왔다. 민원 공무원은 밭주인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채고는 살펴보며 말했다.
"이런 게 밭에서 나올 만한 건 아니지 않나요? 사장님."
"예? 뭐가요?"
"보세요. 이거 의료용 폐기물 비닐이잖아요. 보통 병원에서 의료 폐기물 처리할 때 쓰는 비닐이라고요."
공무원의 말에 밭주인의 표정은 더 멍해지고 있었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표정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심지어 비처럼 흐르는 땀은 거리가 좀 있는 완수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야. 거기. 너. 뭐 알지?"
밭주인의 반응과 그 뒤에 숨어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반응을 모두 살핀 공무원은 지금의 이 상황에 저 외국인 노동자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는지, 대화의 대상을 그 외국인 노동자로 바꿨다.
"야. 네가 우리나라를 잘 모르나 본데, 우리나라는 밭에다가 의료 폐기물 같은 거 막 묻어버리고 그러면 안돼! 이거 범죄야! 깜빵 간다고! 알아?"
"몰라요... 저는 모.. 몰라요."
당황한 채 주인의 뒤로 숨어드는 외국인 노동자는 커다란 주인의 덩치에 가려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장님. 쟤. 불법체류 아니에요? 혹시?"
"아니에요. 쟤. 비자받고 제대로 들어온 얘예요. 제가 저래 보여도 지네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 말을 하던 과수원 주인은 뭔가가 떠오른 듯 말을 멈췄다.
"뭐요? 쟤 지네 나라에서 뭐였는데요? 예?"
"아... 나름 명문대 다니던 얘라고요. 여기도 무슨 교환학생, 그런 걸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방학 때만 일하는 거고."
"그러니까 사장님. 그게 더 무서운 거예요. 저런 얘들이 머리까지 좋으면, 진짜 무섭다니까."
"에이 설마요. 저 야리야리한 놈이 뭘 한다고요."
"그래도 사람은 믿는 거 아닙니다. 저기 우선 여기 좀 파봐도 되죠? 사장님! 삽 좀 주세요. 삽"
그런데 땅을 파보겠다는 공무원의 말에 밭주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잠사만요."
"예?"
"지금 이런 비닐조각 좀 나왔다고, 갑자기 사람을 막 의심하고 선량한 시민의 땅을 멋대로 파보고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예상과는 다른 밭주인의 반응에 공무원은 아주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 진짜 큰일 나요. 혹시라도 저 놈이 사장님 몰래 이상한 거라도 묻은 거면, 나중에 같이 엮일지도 모른다고요. 막말로 쟤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 사장님이 시킨 거다. 이래 버리면 어쩔 건데요? 그땐, 진짜 답이 없어요. 사장님! 지금이라도 제가 있을 때 이렇게 확인해보는 게 다행인 거예요."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사장님 그래도 이게 저도 관리 감독하는 사람 입장에서."
"지금 오셨잖아요. 잘 둘러보셨고. 그리고 혹시 궁금한 거 있어서 확인도 했고. 제가 지금 이건 그냥 날아다니는 비닐조각이 그냥 땅에 좀 들어간 거다. 말씀도 드렸잖아요."
"예?"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밭주인은 그 말을 하며 공무원에게 더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느낌상으로는 밭주인이 공무원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넣은 것 같기는 했지만, 멀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식사나 하러 가시자고요. 먼저 차에 가 계시면, 제가 바로 따라갈게요."
공무원은 머뭇거리다가 덩치가 큰 밭주인의 힘에 못 이기는 척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밭을 벗어나 길로 올라서자 밭주인은 공무원에게 차로 먼저 가라는 듯한 손짓을 했고, 그가 차로 가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뛰어서 밭의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왔다.
"너! 이거 뭐야!"
"어... 그게..."
"말 똑바로 안 해?"
"사장님. 그게요..."
"아니야. 우선 이따가 얘기해. 지금 저 사람들 기다리게 하는 게 더 이상하니까."
"예. 사장님."
"그리고 땅 건들지 마. 내가 올 때까지. 괜히 지금 또 헛짓거리하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내가 확 경찰에 신고해버릴 테니까. 알았어!"
"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
완수는 우선 그 외국인 노동자가 순간 아주 정확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외국인 노동자가 저렇게 말을 잘한다는 것은, 장인어른을 이미 속이고 있었다는 뜻이고, 이미 모든 상황들을 자신의 계산으로 설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지난밤에 장인어른이 본 것도, 의료폐기물 비닐에 쌓여 있는 무엇인가다. 의료폐기물 비닐에 무엇이 들어 있었든 간에 이건 범죄의 상황이 분명했다. 장인어른이 밤에 목격하신 것도, 지금 내가 숨어서 본 이 모든 상황도, 범죄의 경중을 떠나서 범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심지어 저들의 행동을 보니 더 확신이 들었다. 완수는 우선 이 모든 상황을 알리고 함께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수원 사장이 가고 난 자리에는 뭔가 눈빛이 변한 외국인 노동자가 서있었고, 그는 떨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느리게 밭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의료용 비닐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도 주변을 계속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완수는 나무 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완수의 발목과 손목, 얼굴에는 수많은 모기들이 공격하기 시작했고, 혹시라도 움직이면 그에게 들킬까 봐. 그는 또 가만히 모기들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잠시 후 외국인 노동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완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향해서 뛰기 시작했고, 온몸이 땀에 젖을 때쯤 차에 도착했다. 운전석에 올라 탄 완수는 그때서야 밀려오는 간지러움에 손목과 발목과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대기 시작했다. 시동을 켜고 에어컨도 제일 세게 틀었다. 그렇게 차의 온도가 떨어지고 땀이 식기 시작하자 간지러움은 좀 가라앉기 시작했고, 조금 진정이 되고 거울로 확인 한 얼굴과 목은 수십 방의 모기 물린 자국과 긁어서 생긴 수많은 생채기들이 남아 있었고, 그의 손목과 발목은 이미 더 많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수많은 상처와 바꾼 정보들이었다. 완수는 조금 진정이 되자 과수원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무슨 일인지 장인어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완수는 급한 마음에 장모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장인어른을 찾았다.
"장모님. 장인어른께서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혹시 주무세요?"
"아니. 아까 어디 가볼 때가 있다고 나가셨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뭐 시킨신게 있어서요. 장모님 저 오늘 외근이 있어서 잠시 나왔다가 현장에서 퇴근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과수원에 가는 길이예요."
"아 그래? 뭔 일은 없고?"
"아 예! 그냥 근처 온 김에 얼굴 보고 말씀드리려고요."
"그래 알았어. 조심히 와"
장모님과 전화를 끊자 왠지 몸이 으스스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차의 센터페이아를 보니 차의 에어컨이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저 에어컨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잔뜩 흘렸던 땀이 식어가면서 그러는 건지. 온몸이 서늘해지는 한기는 에어컨을 끄고 나서도 한참을 이어졌다. 그동안 완수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있었지만, 무엇하나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어서 선록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선록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서. 어디야?"
"예? 지금 과수원으로 가는 길이요."
"놀라지 말고 들어. 아무래도 지금 아버지가 납치를 당하신 것 같아."
"예? 뭐라고요!"
선록의 말에 차갑게 식었던 완수의 등에 다시 땀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