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6
선록은 갑자기 입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창고에 계셔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집안에 있는 그 남자가 들을 수도 있어서 더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는 급한 마음에 뽑던 파를 던지고 지하창고로 향했다. 지하창고에는 아버지가 그 남자에게 팔 포도즙을 상자에 담고 있었다.
"아버지!"
"왜?"
"저 건너편 밭에 그놈이 나타났어요!"
"누구? 그 외국인 놈?"
"예! 아무래도 어두워지니까 나타난 거 같은데, 어제 묻은 걸 다시 파가려는 게 아닐까요? "
"아 그러네.. 이걸.. 어쩐다"
그때 완수도 급하게 지하 창고로 뛰어들어왔다.
"장인어른! 그 필리핀 놈이!"
"알아. 알아. 지금 들었어!"
"아. 그러세요?"
"이제 진짜 어쩌죠? 지금 누가 나가서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봐야지! 그놈이 또 뭔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선록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 CCTV요! 돌리셨어요? 그쪽으로?"
"아니. 지금 돌리자."
"여기서 조정이 돼요?"
"그럼! 폰으로 조정하면 돼. 기다려봐!"
장인은 갑자기 휴대폰을 켜서 CCTV 어플을 실행했다. 장인은 원래 이런 것을 잘 다루는 편은 아니지만, 이 어플만큼은 자신 있게 다룰 수 있었다. 왜냐면 과수원에서 파는 포도를 훔쳐가는 사람은 없었는데, 포도 말고 소소하게 심어진 작물들은 사람들이 수시로 훔쳐가곤 했기 때문이다. 자두나 채리, 복숭아나 석류 같은 과일들은 얼마 안 심어서 팔지는 않고, 가족끼리 나눠먹기 위해 조금씩 기르고 있는데, 꼭 그런 것들만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것처럼 따려고 날만 잡아 놓으면 그전에 다들 훔쳐가곤 하는 것이다. 처음에야 그저 동네 사람들이 조금 따가나 보다 생각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결국 장인은 CCTV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용도로 설치된 CCTV가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장인은 집 뒤편에 채리나 무 쪽으로 설치되어 있던 CCTV를 어플을 통해 그 밭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게 좋은 거라 화질도 화질이지만 밤에 적외선 촬영도 아주 기가 막히게 된다니까."
장인이 CCTV를 그 방향으로 돌리자, 적외선 카메라로 외국인 노동자의 움직임이 녹색을 띠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카메라를 통해서도 아주 많이 불안해하는 것이 보였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밭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거 녹화도 되죠? 진짜 이건 빼박인데요?"
"시청에도 구체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놈 아주 제대로 걸렸다!"
근데 그때 순간 선록의 표정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잠시만요! 저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뭔데?"
선록은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새로운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들은 완수와 장인의 표정은 갑자기 환해지기 시작했다.
"형님! 진짜 좋은 생각인데요!"
"그래 우선 해보자!"
계획을 다 들은 그들은 나가자마자 자신이 맡은 것을 빠르게 마무리했다. 그 사이에 그 외국인 노동자는 마치 그들을 기다려주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쭈뼛거리며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쪽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혹시라도 외국인 노동자가 자신들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까 봐 일부러 그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각자의 역할만 다하고 있었다.
장모가 시킨 일을 다한 그들은 서로 조용히 눈빛 교환만 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그 남자가 아내들과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장모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열심히 김치찜을 만들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TV는 크지 않은 소리로 켜 있었는데, 장인과 사위들을 들어오자마자 그 TV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아버지, 그 CCTV, 거실에 있는 TV로도 볼 수 있죠?"
"그렇지! 바로 연결되어 있어!"
"그럼, 그놈한테 쟤를 보여주는 것은 어때요? 모르는 척 말이죠!"
"와! 대박!"
"그렇지!, 만약에 둘이 진짜 연관이 있고, 혹시 어제 묻은 것에 그놈이 관련이 있다면 분명히 어떤 반응이 오지 않겠어? 그럼 그것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잖아! 특히, 그 모든 게 녹화되고 있다는 것까지 알면, 지금처럼 저런 가증스러운 표정은 절대 할 수 없을걸?"
아까 지하 창고에서 세운 계획은 그랬다. 그저 그 CCTV 영상으로 경찰이나 시청에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TV를 통해서 그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그 남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남자와의 관계까지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집으로 들어왔고, 마침 TV도 켜있자, 자연스럽게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 우리 채리 나무 있는 쪽으로 고라니 큰 놈이 훅 지나가더라고! 이 놈이 또 그 채리 달린 거 다 따먹는 거 아닌가 몰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딸들과 그 남자는 장인의 말에 대화를 멈추고 장인을 쳐다봤다.
"진짜? 고라니가 채리도 먹어?"
"그럼 못 먹는 게 어딨어! 나무에 달린 거는 다 뜯어먹고 다니지!"
"아! 우리 채리 진짜 맛있는데? 올해도 못 먹어요?"
"아니 내가 그쪽으로 돌을 던져서 쫓기는 했는데, 보자! 잘 갔는지 내가 좀 봐야겠다."
장인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TV 리모컨을 들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장인은 외부 입력 버튼을 통해서 CCTV 화면을 실행시켰다.
"우와! CCTV로 그게 보여요?"
"그럼! 요즘 얼마나 좋은데, 이거 밤에도 다 보이고 줌도 되고, 저장도 된다니까!"
그 순간 바뀐 TV 화면에는 녹색톤으로 이루어진 적외선 카메라의 화면이 잡히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 보인다! 진짜 뭐가 움직이네! 어! 근데, 여기 우리 밭이 아니지 않아? 저 건너편 밭 같은데?"
"어 그러네.. 근데 저게 뭐야? 저 밭은 이 밤에 뭘 하는 거지?"
"아빠 거기 줌 좀 해봐!"
"아 그럴까?"
장인은 딸들의 반응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CCTV 어플을 통해서 화면 중심에서 작게 움직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확대했다. CCTV의 성능은 진짜 좋아서 줌으로 당기자 외국인 노동자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이 정확하게 보였고, 심지어 그의 표정까지 보이는 듯했다.
"참나, 그렇게 좋은 거 좋은 거 찾더니 진짜 좋긴 하네! 아주 쟤 땀방울까지 보이네. 근데 자는 어제부터 밤마다 저기서 뭐하는 거래?"
장모의 말에 남자들은 숨을 죽이며, 그 남자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 남자의 표정은 애써 평온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는 듯했지만, 장모의 말에 손가락이 불안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인은 그 남자의 그 반응에 더 신이 났는지. 카메라를 더 확대해서 그의 표정과 행동들을 자꾸 보여주고 있었다.
"저 놈이 뭔가 찝찝하다니까. 심지어 필리핀에서 의대에 다녔다고 하니까. 난 그게 더 이상하더라고. 막말로 저놈이 지 사장도 모르게 저기다 뭘 파묻었는지 어떻게 알아?"
"와 저 사람이 필리핀에서 의대를.."
완수의 아내가 장인의 말에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 남자가 갑자기 일어났다. 여자들에게는 그 남자가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그의 행동을 계속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들에게는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제가 갑자기 급한일이 있어서요. 잠시 통화를 좀.."
그 남자는 아주 급하게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가 나가자마자 남자들은 다시 TV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화면에는 전화를 받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보였고, 그 역시 아주 많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갑자기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급하게 자신의 밭쪽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는 얼굴에 땀이 맺힌 채 문을 열더니 장모에게 말을 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에 지금 응급환자가 들어와서요. 제가 지금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밥은 다음 기회에 꼭 먹고 가겠습니다. 포도즙도 다음에 다시 사러 올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장모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고, 장모와 아내들은 이 상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모두 목격한 세명의 남자들은 왠지 모를 미소가 입에 번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통쾌한 것은 항상 여유 있는 척 자신들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주던 그 남자의 다급한 모습을 본 것이었다. 심지어 지금 이 상황은 그동안 심증만으로 가득하던 사건이 조금씩 구체적인 증거들로 드러나고 있다는 느껴지는 것도 그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이 상황을 궁금해하는 여자들과는 다르게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장모의 김치찜을 맛있게 먹었고, 장인이 일을 좀 도와달라는 핑계로 다시 나와 오두막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희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저 놈도 우리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과 증거가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만큼 주춤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좀 움직여 보시죠!"
"계획이 있어?"
"예! 있어요! 저 놈의 본색을 다 까발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