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5
과수원에서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남자의 차에서 내린 장모와 두 딸들. 그리고 원두막에서 그 남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장인과 두 사위. 그리고 그 사이에 서있는 그 남자. 처음에 몇 마디를 나누고는 아무도 섣불리 말을 못 떼고 있었다. 남자들은 너무 당황해서 말을 못 떼고 있었고, 여자들은 이 상황이 어색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래도 좀 진정을 한 완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왜 그 차를 타고 오시는 거예요? 다들?"
"마트 앞 사거리에서 만났어. 마침 포도즙을 사러 오신다고 해서 모시고 왔지."
완수의 아내가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장인이 말을 했다.
"아는 사람이야? 원래?"
"아영이 친구 아빠야! 우리 아파트 사시고"
장인은 작은 딸의 그 말에 뭐라고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그때, 더 소름이 돋은 건 그 남자가 갑자기 아주 예의 바른 태도로 말을 건네었다는 것이다.
"어르신 아까는 제가 실례했습니다. 아영이 외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실례를 했네요."
"아. 뭐 그거야. 그럴 수도 있는데..."
문득 그때 장인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근데 아영이네랑 같은 아파튼데, 아까 거기는 왜 왔어요?"
순간 사위들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그 남자가 거기에 있었던 이유야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보다는, 이 상황에서 그가 뭐라고 대답하는지가 너무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모두 집중하고 있었다.
"아. 거기 친구가 살아요. 그 친구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 외국에 오래 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집을 좀 돌보고 있어요."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남자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장인은 주춤하지 않고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그 냉동 탑차는요? 그것도 친구 차라고? "
"예! 맞아요. 그 친구가 차 그냥 오래 두면 망가진다고, 가끔씩 한 번씩 몰아주고, 냉동도 켜달라고 부탁해서요. 제가 가끔 관리를 해주고 있거든요. 이번에 제가 스티커도 귀여울 것 같아서 좀 붙이고요."
"아니, 그런데 그런 거에 비해 좀 너무 민감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아버님하고 통화하고 있어서 대화하시는 거 들었는데, 좀 과하시던데요."
"아.. 저기 혹시 그 쪽 분도 저랑 구면이시죠? 예전에 당근 거래하신 거 같은데.."
선록은 그 남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을 했다.
"아.. 예.."
"그때도 제가 좀 예민하게 굴었던 거 같은데요.."
"예.. 맞아요.."
"실은 제가 오해를 너무 많이 받아서요."
그 남자는 선록을 보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완수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 제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는데, 다 이 근처 살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다 갑자기 집을 비우게 될 사정들이 생겨서 제가 대신 그 집들을 좀 돌보고 있거든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자꾸 제가 불륜을 하고 있다. 두 집 살림이네, 세집 살림이네, 말이 많아서요. 그러다 보니까 누가 저나 제 친구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거 같으면,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좀 예민해지더라고요. 불쾌하셨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 남자의 정중한 사과에 선록은 순간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별말씀을요. 저도 좀 무례하긴 했죠...."
하지만 그 남자의 정중한 사과에도 의심이 전혀 가시지 않은 완수는 오히려 더 날카롭게 말을 이어 갔다.
"아영이 아버님, 그럼 저한테 그렇게 말씀해주시죠? 저랑 몇 번이나 마주치셨잖아요."
"아. 저는 당연히 아영이 어머님께서 말씀하신 줄 알았죠.."
그때 갑자기 완수의 아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참나. 그런 거였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아영이 아버지, 이미 우리 어린이집이랑 맘 카페에서 난리가 났었어. 여기저기서 불륜 남이라고 소문이 돌아서 하시는 소아과도 망할 뻔하셨었다고. 그런데 그 친구분들 아내분들이 다 해명해주시고, 오해 풀어서 아무 일 아닌 걸로 다 넘어갔단 말이야, 근데 혼자 그 난리였던 거야?"
"아니, 그게.."
완수도 순간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그가 한 말이나, 아내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뭐라고 자신이 반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다른 남자들도 동일했다. 지금까지 그 남자를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 지었던 상황들이 그의 말에 하나씩 풀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순간 그들은 이 상황이 다행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남자분들은 모르실 수 있어요. 제가 곤란했던 일을 당한 게 어차피 맘 카페에서였잖아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완수는 그 남자의 말과 아내의 설명에도 모든 의심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하고 있었다.
" 저 그런데.."
그때 그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제 친구 차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신지는 제가 좀 여쭤봐도 될까요? 한분도 아니고 이렇게 다들 관심이 많으시니 뭔가 이유가 있나 해서요."
"아 그게.. 그러니까.."
선록은 순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선록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장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을 한 것은 장인도 매한가지여서, 똑같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을 구원한 것은 선록의 아내였다.
"아. 그건 별거 아니에요. 이 사람이 뭘 좀 착각한 거 같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이렇게 오해가 풀렸으니까. 앞으로는 신경 쓰실 일 없으실 거예요. 그렇죠?"
그 남자의 표정은 선록의 아내의 설명으로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선록을 쏘아보고 있었다. 선록은 그의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장인 역시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아. 근데 뭘 여기 서서 이렇게 말들이 많아요? 다들 모였고, 이렇게 손님도 오고 하셨으니 식사나 다 같이 하시죠. 거기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오신 김에 식사나 하고 가세요. 차도 태워주셨는데."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냥 포도즙만 사 가지고 갈게요."
"아니에요. 무슨 소리세요.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오해도 푼 기념으로 식사나 하고 가세요. 저희 어머니 김치찜 진짜 맛있어요."
"그래도 저.."
그 남자는 완수의 아내의 권유에 마치 허락이라도 바라듯이 장인을 바라보았다. 장인도 그의 눈빛이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했다.
"그래요. 밥 먹고 가요. 시간도 늦었는데..."
"아.. 예.. 어르신 그럼 실례를 좀 하겠습니다."
그 남자는 장모의 안내를 받으며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남자들은 꾸물거리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장모는 포도밭을 지나면서 뒤에서 수군거리며 쫓아오는 남편과 사위들에게 참지 못하고 한 마디씩 했다.
"그렇게 꾸물거리지 말고, 당신은 포도즙 좀 미리 창고에서 가지고 오고요. 자네들은 파랑 부추 좀 텃밭에서 따와."
"알았어."
"예."
"예."
장인과 사위들은 그렇게 따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각자 흩어지게 되었고, 그 남자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선록이 분명히 목격한 것이 있다. 그 남자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건너편 밭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가 실제로 그 밭을 응시한 시간은 아주 짧을지 모르지만, 선록에게 보인 그 모습은 그 밭을 좋지 않은 표정으로 정확하게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선록은 잠시 혹시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표정을 보는 순간,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의 대답들은 분명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들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인과 사위들이 경험한 모든 의혹들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모두 심증과 추측인 것처럼, 그의 반박 의견도 모두 그의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 되기도 했다.
선록은 김치찜에 넣을 파를 뽑으면서, 건너편에 있는 밭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밭을 바라보던 그 남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 그가 해명해야 할 것이 많다고, 아니 우리가 알아봐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렴, 하늘은 붉은 노을마저도 사라지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밭에 내려오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 외국인이요!!"
저 멀리서 그 외국인 노동자가 두리번거리며 밭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록은 큰 몸짓으로 아버지를 부르면서 목소리를 죽여 이 상황을 알렸다.
"아버지! 아버지! 그 외국인이요!!, 그 외국인이 밭에 나타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