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정말 오랜만에 잠을 푹 잔 기분이었다. 요 며칠 계속해서 주변에 안 좋은 일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들도 나의 트라우마를 하나씩 이겨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잔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기분 좋은 햇살을 받으면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삼촌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선아. 일어났니?”
“어. 삼촌.”
“너 지금 시간이 몇 시 줄 알아?”
“몇 신데?”
나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삼촌에게 시간을 물어봤는데, 순간 어제 시우에게 받은 해시계가 떠올랐다. 그래서 급하게 어제 입었던 옷이 있는 옷장으로 달려가며, 시간을 말하려는 삼촌을 막았다.
“삼촌. 시간 말하지 마! 잠깐만!”
나는 그대로 주머니에 있던 작은 해시계를 꺼내서 창가로 가지고 갔고, 처음에는 어떻게 보는 줄 몰라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금세 방법을 찾아내고 삼촌에게 물었다.
“지금 10시 반쯤 된 거야?”
“어! 10시 25분! 빨리 내려와 삼촌이 브런치 만들어 놨어.”
나는 뭔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해시계가 뭔가 나의 일상을 달라지게 만들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해시계를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두고 밥을 먹으려고 내려왔다. 식탁에는 삼촌이 근사하게 차려놓은 브런치가 놓여 있었다.
“우와 이거 다 삼촌이 만든 거야? 이런 것도 배워?”
“그럼. 다 삼촌이 했지요.”
“좋다. 삼촌 연애하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좋아.”
“우와. 부럽다!”
“너도 해!”
“나?”
나는 삼촌의 말을 듣는 순간, 시우의 얼굴이 스쳤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민우 오빠의 얼굴이 떠올라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도 모르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누구를 떠올리는지는 모르는 삼촌은 그냥 나의 표정만으로도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민우야?”
“아. 아니야. 아직.”
삼촌은 뭔가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그냥 넘어가 주는 것 같았다. 나도 삼촌의 질문에 아니라는 부정을 한 것도, 거기에 아직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계획은?”
“그냥 뭐. 삼촌 커피나 마시면서 또 책이나 읽지 뭐.”
“그래. 난 이따가 좀 나갔다 올게."
“아. 그래요.”
“늦지는 않을 건데. 배고프면 뭐 좀 만들어 달라고 하고.”
“응. 알았어요.”
삼촌은 브런치를 다 먹고 무언가를 챙겨서 나갔다. 정확한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얼핏 본 것은 내가 어제 덮고 있었던 담요 같았다. 물론 얼핏 본거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걸 담는 삼촌의 표정이 심각한 것 같아서, 더 신경 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부터 이어지는 나의 시간들이 너무 여유롭고, 따뜻해서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시우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멍하게 테이블에 엎드려서 그의 생각을 하다 나는 어느새 또 잠이 들어 버렸다.
“식사 좀 챙겨드릴까요?”
나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선우의 말에 잠에서 깼다.
“아니요. 괜찮아요.”
“사장님께서 꼭 챙겨드리라고 했는데,”
“그럼 저 샌드위치 하나 만들어 주실래요?”
“참치 괜찮으세요?”
“예. 아. 대신 죄송한데 두 개 부탁드릴게요.”
난 선우에게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볍게 외투를 챙긴 나는 다시 창가에 가서 해시계를 봤다.
다시 바라본 해시계의 바늘은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그를 닮아 있었다.
“벌써 2시가 넘었네..”
내가 샌드위치를 두 개나 주문한 것은 어쩌면 오늘도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외투와 샌드위치와 커피를 챙겨서 그 밴치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여전히 엄청났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을 멍하게 경치만 보고 있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삼촌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커피는 더없이 향긋했다. 문득 허기짐을 느껴서 나는 포장해 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나머지는 다시 입구를 잘 막아서 옆자리에 올려두고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노을은 마치 내가 샌드위치를 먹기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 찾아왔고, 나는 그 노을을 감상하느라 샌드위치를 잘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 먼 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마지막 붉은 점이 산 뒤로 넘어갈 때,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제 거예요?”
“아뇨.”
“그래요? 나 배고픈데, 좀 나눠주면 안 돼요?”
“왜 이 시간까지 밥을 안 먹었어요?”
“그냥 왠지 누가 공짜 샌드위치를 줄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웃으며 그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처음에는 포장을 벗겨서 줄까도 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하기로 했다. 그 역시 자연스럽게 샌드위치를 받아서 먹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앞을 보고 있었다.
“톨스토이 좋아해요?”
“예?”
그는 나에게 책을 한 권 내밀었다. [톨스토이 단편집]이었다.
“어?”
“어제 두고 갔더라고요. 근데 오늘도 톨스토이를 읽고 계시길래.”
나는 옆자리에 잠시 내려둔 책을 봤다. 그에게는 분명히 30cm 넘는 거리감이 있는데, 그 책을 알아봤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쉽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마치 읽고 있는 것처럼 대답을 했다.
“아까 오자마자 책이 있는 걸 보고 들어서 봤어요. 어제 책을 두고 갔는데, 오늘은 무슨 책을 가지고 왔나 궁금해서, 근데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지도 못하더라고요.”
“그랬구나. 톨스토이 처음 읽어봐요. 뭐 얼마나 대단한 작가 인지야 수업시간에 많이 배웠었지만, 굳이 찾아 읽지는 않았거든요. 근데 어제 삼촌 책장에 있는 게 그냥 눈에 띄어서 가지고 왔는데, 재미있어서 오늘도 톨스토이 책을 가지고 온 거예요. 전 이 책을 두고 간지도 몰랐네요. 그쪽은 무슨 책 좋아해요? 아…”
나는 또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을 했다.
“괜찮아요. 책 가끔 읽어요. 쉽지는 않지만, 주로 어떤 책을 좋아한다는 취향은 없지만, 주로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좋아해요. 뭔가 글로 읽는 것은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는 것보다 자극이 더 셀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소소하고 편안한 이야기들을 지루하게 읽는 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뭐 화려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이미 많으니까.”
내가 그와 대화를 하면서 신기하다고 느끼는 점은 아마도 이런 부분일 것이다. 나는 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마치 나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생각, 나의 취향, 심지어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나라도 이렇게 대답을 했겠다는 것까지. 그런 모든 것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근데 괜찮아요? 많이 어두워졌는데?”
“그때 말했잖아요. 혼자가 아니면 괜찮다고.”
“그렇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괜찮았는지도 몰라요. 나한테 그때의 경험은 너무 충격적이고 힘들었기 때문에 트라우마로 남은 건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제 기억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거든요. 처음에 며칠은 너무 무섭고 힘들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를 느끼고, 그로 인해 진정을 하게 된 후에는 오히려 편안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요. 그래서 실제로는 그 사건이 저에게 소름 끼치게 힘든 기억은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그렇죠. 너무 다행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저의 괜찮다는 말을 잘 안 믿어 주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절대 괜찮을 리가 없다고. 그래서 오히려 저의 괜찮다는 말에 더 가슴 아파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특히, 저희 엄마는 제가 힘들어해도, 괜찮아해도 항상 슬퍼했어요. 힘들면 자신 때문에 힘들게 된 것 같아 가슴 아파하고요. 괜찮다고 하면 자신 때문에 철이 일찍 들어버린 거라고 안쓰러워하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나마 엄마가 내가 안 괜찮을 때, 더 힘을 내시는 것 같았어요. 나를 지켜야 한다. 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계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엄마를 불렀어요. 혼자도 괜찮았지만, 엄마를 찾았고요. 그때마다 엄마는 걱정하는 잔소리를 하며 나에게 달려왔지만,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어요. 그래서 그런 거 같아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는데, 힘들었던 기억으로 포장하고 살아온 거, 이미 충분히 괜찮아졌는데도 안 괜찮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거.”
“하지만 아직 증세가 남아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렇죠.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또 이렇게 괜찮을 수도 있잖아요.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저는 알아요. 그래서 이제는 좀 괜찮다고 말해보려고요. 나는 괜찮은 거다. 지금까지는 나를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은 연기를 한 거다. 그러니 이제 나 혼자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게, 정말 괜찮을 거다라고요. ”
“다행이네요.”
우리는 서로 마주 보지 않았지만,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도 한참을 그와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우리가 한 이야기들은 영화 얘기, 음악 얘기,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곳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하나 같이 서로의 생각과 취향이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그에게로 내 마음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내일 가요.”
“네.”
"그게 다예요?"
"그럼요?"
나는 내 마음을 알고도 그가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조금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결국 내가 먼저 물어봤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어요?”
그는 나의 질문에 얇은 미소를 보였다.
“글쎄요. 아마도요?”
“왜 대답이 그래요?”
나는 그의 모호한 대답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알 수 없잖아요. 우리가 그 밤에 처음 만난 것도, 어제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계획하고 예상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전 오늘은 기대했어요.”
“물론 저도 기대했어요. 하지만 꼭 우리의 마음과 약속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만날 사이라면 다시 만나겠죠.”
“운명론자 이신가요?”
“아니요. 그냥 인연을 믿어요. 관계 속에 이어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거요. 그래서 그냥 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그 실을 당겨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그럼 당기실 거예요? 나하고 이어진 실이 있다면,”
“아마도요.”
우리는 대화가 아주 잘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끔 명확한 답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딘가를 빙빙 도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그에게 연락처를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의 말에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는 한때 무엇인가를 너무 간절하게 원한적이 있어요. 내 삶의 가치는 오로지 그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그것은 절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후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이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날 불렀어요. 그리고 나를 잡아당겼죠. 나는 알고 있었어요. 이 역시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끈은 당겨졌고, 만나게 되었어요.”
그가 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은 건 그와의 대화는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았지만, 모두 남겨 놓고 갈 수 있었다. 만약에 끈이 이어졌다면 서로 당긴다고 이야기했으니. 아니 그도 당긴다고 했으니.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나에게는 하늘처럼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나에게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야 할 시간이라는 말과 때마침 걸려온 민우 오빠의 전화를 내가 받는 사이. 또 그 어두운 길로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처음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렇게 놀랍지 않았고,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리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와의 실을 당길 수 있는 기회는 훨씬 더 일찍 찾아왔다.
“선아. 너 방학 때 일정 있어?”
“아니. 아직은 없어. 왜?”
“여기 여름에 인기 많아. 그래서 일손이 항상 부족하거든, 그러니까 방학하면 와서 좀 도와. 아르바이트비는 많이 줄게.”
“그래요. 난 좋지.”
난 민우 오빠의 차를 타고 삼촌의 카페를 떠나면서도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어쩌면 떠나기도 전에 다시 돌아올 약속을 잡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곧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문득 옆자리에서 운전을 하는 민우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더 미안한 것은 그 순간 나에게 옆자리의 민우 오빠보다 두고 온 사람에 대한 여운이 더 크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