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집에 돌아오고 난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선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시우에게 원래 오래전부터 괜찮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나는 정말 원래부터 모든 것이 괜찮았던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증상들이 마치 나의 연기였던 것처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부터 도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날 내가 스스로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려보니 생각보다 많이 겁이 나지는 않았다. 처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혼자 들어갔을 때, 나는 진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나는 원래 괜찮았다를 외치고 있으니 조금씩 진정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21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우와! 대박!”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고 21층까지 갔다 온 것보다, 태어나서 삼겹살을 처음 먹어봤을 때, 더 큰 감탄이 나왔다는 것이다.
“진짜 맛있어!”
우리 가족은 내가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외식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외식뿐만 아니라, 여행을 가거나 나들이를 가는 것도 거의 없었다. 당연히 그 사건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이 생긴 엄마의 영향이 가장 컸고,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한 아빠의 역할도 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매 끼니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하고, 다 같이 모여 후식을 먹으며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가족 외식이나 가족 여행에 대한 경험이 아예 없어서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대체한 경험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았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우리 가족이 이상하다거나, 그런 환경에 대한 불평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그러다 보니 내 나이에 평범한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경험들마저도 나에게는 없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겹살이었던 것이다.
“야! 진짜 삼겹살을 처음 먹어본다고? 진짜로?”
“어.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아빠가 돼지고기 냄새에 민감하셔서, 구워 먹는 고기는 주로 소고기만 먹었어. , 딱히 한국에 있을 때, 외식을 다닌 것도 아니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24살인데? 삼겹살을 처음 먹어볼 수 있지? 너 외국에 나간 것도 꼴랑 4년인데?”
“그럴 수 있어.”
“예? 설마? 오빠도?”
“아니! 나는 작년에 먹어봤지. 나는 처음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일주일에 10번 먹은 적도 있어.”
“아니 그것도 이상해! 일주일에 삼겹살을 어떻게 열 번을 먹어요?”
“하루에 3번 먹은 날도 있고, 2번 먹은 날도 있어서.”
어쩌면 민우 오빠도 나랑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나보다 훨씬 먼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나보다 겨우 일 년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마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가기 전까지는 나보다 훨씬 더 외롭게 그곳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모도 우리 엄마만큼 힘들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오빠에 대한 동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민우 오빠가 우리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쉽게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이유는 바로 그 검은 야상의 사람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듯했지만, 그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아서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우리를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그 검은 야상의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우리 집이 보이는 그 벤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경비실에 연락을 하기만 해도 그는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아파트 CCTV에 아주 정확히 찍혔지만, 그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만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분명히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 있다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니 머리 방향이 우리 쪽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아가씨? 야상을 입고 모자까지 써서 코도 못 봤다면서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가씨 집을 보고 있는지, 안 보고 있는지는 어떻게 아냐고요?”
“아니 사람이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요. 그 아가씨 느낌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거기를 몇 번이나 갔냐고요? 그런데 저희는 그 야상 입었다는 사람 코빼기도 못 봤잖아요?”
“그래서 CCTV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아가씨들도 같이 봤잖아요? 거기 경비반장님까지! 그게 어디 아가씨 집을 훔쳐보는 거예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줄담배를 피는 거지?”
“아니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맨날 같은 자리에서 그것도 비슷한 시간대에 그것도 한참이나 그렇게 담배를 피우다 가는 게.”
“아가씨 제가 흡연자라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요즘 흡연자들 진짜 힘들어요. 집에서도 설 자리가 없어. 그런 사람들 있어요. 요즘에 비옷 입고 나와서 젓가락으로 담배 피우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처럼 다 가려지는 옷 입고, 숨어서 피다가는 사람도 있고, 제가 보기에는 평소 때 자유롭게 담배를 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몰아서 피우고 가고 그러는 거야. 아직 아가씨네 집에서는 피해본 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좀 넘어갑시다. 정 찝찝하면 커튼을 좀 바꾸면 되잖아요.”
희연이가 나 대신 경찰서에 가서 몇 번이나 싸워줬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라고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찝찝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이런 상황이 민우 오빠에게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게 만들어주는 명분이 되었고, 나는 그런 민우 오빠를 거부하지 못하는 핑계가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이사를 갈까도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왠지 이사를 가도 쫓아올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럴 거라면 차라리 익숙한 동네인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의심이 되는 피자집에 전화를 해보기도 했었다.
“아. 걔요? 그 뒤로 연락 안 되는데?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이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거 같기는 한데, 또 근처 사장님들한테 물어보면 그런 애는 없다고 하거든요. 왜요? 걔가 무슨 사고 쳤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제가 그분한테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 혹시 걔 잔돈 안 주고 튀었어요? 아 꼭 그런 자식이 자잘한 사고를 친다니까. 제가 보니까 얘가 딱 그렇더라고요. 정말 소심해가지고, 뭔 큰일을 칠 놈은 못 되는데, 또 애가 뭔가 다크한 게 있어가지고 마냥 순둥이는 아니거든요. 그거 잔돈 얼만지 모르는데, 수표 준 거 아니면 그냥 봐주세요. 개도 알고 보면 많이 불쌍한 애예요.”
우리는 피자집과 통화를 하고 나니 머리가 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그 배달원이 사고를 칠만한 사람이라는 건지, 아닌 건지. 아니면 아직 이 동네에 있다는 건지 아닌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장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 탁 와서 걸리긴 했다.
“걔도 알고 보면 불쌍한 얘예요.”
그 말에 마지막에 현관 앞에서 한참 울던 그 배달원의 울음소리가 떠올라서 나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경찰들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아무아무 피해본 것이 없었고, 어쩌면 모든 것은 우리들의 착각과 과대망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그 사람에 대해 불안한 것은 그의 존재가 단순히 우리 아파트에서만 목격된 것이 아니라, 민우 오빠의 학회가 있었던 홍성의 그 호텔에서도 보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는 서로 괜찮다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는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진 건 여름방학을 한 달쯤 남겨둔 어느 초여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