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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Jan 14. 2022

해시계_11

세 번째 장편소설

다시 홍천


희연이네서 보냈던 2주의 시간은 마치 이틀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사람이 북적북적한 분위기, 내가 어느 시간에 들어가든 항상 거실에 누군가가 있고, TV가 켜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워낙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어서 그런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색하거나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특히, 희연이의 아버지는 우리 아빠의 동네 술친구셨는데,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우리 아빠와 뭔가 느낌이 비슷했다. 그래서 가장 불편할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희연이의 어머니께서는 매 끼니를 아주 푸짐하게 차려주셨었고, 나는 그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맛있게 먹다 보니 2주 만에 3kg이나 몸무게가 늘었었다. 하지만 늘어난 몸무게만큼이나 나는 웃음도 늘었고, 불안함도 없어졌다. 몰카 사건 이후에 왜 희연이가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밝은 집안 분위기에서 2주 동안 충분한 힐링의 시간을 가진 후에 삼촌의 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희연이는 그 사이코 조교에게 잡혀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보니 함께 따라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자신의 집에서 쉬다가 가라고 나를 졸랐지만, 나는 그냥 예정대로 내려가기로 했다.


“야. 나 너네 집에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삼촌이 못 알아볼 수도 있어. 내가 차마 너희 어머니 음식을 거부할 자신이 없다. 내가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서 다이어트 성공하고 올 테니까, 보고 싶어도 좀 참으세요 아가씨?”

 

“참나. 알았어! 대신 내가 봐서 급한 일 끝내고 민우 오빠랑 내려갈 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콜!”


다시 내려온 홍천은 또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미 여름의 기운으로 푸릇푸릇한 풍경을 보여주는 경치는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들까지 더해져서 내내 감탄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나는 삼촌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2층에 짐부터 풀었다. 그리고 바로 시우를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카페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오늘부터 바로 일해야겠죠?”


“그럼 너무 감사하지.”


너무 바쁜 나머지 나에게 반갑게 인사도 못한 삼촌은 예의상 한번 던져본 나의 말에 덥석 대답을 해버리셨다. 나는 그렇게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이 좀 지나고 나자 우리에게도 여유가 좀 생겼다.


“삼촌. 나 커피는 좀 마셔도 되죠?”


“그럼. 커피랑 여기 먹을 것들은 눈치 보지 말고 실컷 먹어. 대신 난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나는 실은 커피 한잔만 마시고, 잠깐 나가면 안 되냐는 말을 물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삼촌은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선수를 쳐버린 것이고, 나도 그냥 나갈까 생각하기에는 주방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의 양이 너무 방대했다.


“아니 저렇게 쌓아놔도 장사를 할 수 있어요? 지금 손님 오면 커피도 못 파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 연애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저 그릇부터 더 샀어요! 나는 저거 파시는 분이랑 연얘를 하시나 했는데, 이러려고 그러신 거더라고요. “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주방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고무장갑을 끼기 전에 무선 이어폰부터 귀에 꽂았다. 이어폰을 꽂자마자 플레이가 되는 노래는 내가 지금 딱 듣고 싶었던 트러스트의 5집 노래였다. 보통은 내가 듣던 노래들이 자동으로 플레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기할 것은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이곳을 오면서 마지막에 들었던 노래가 드라마 OST 모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아주 조금 신기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나는 나도 모르게 시우가 떠오른 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신기함이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불쑥 나타나는 것이나, 내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이나. 심지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잘 맞는 그는 나에게 가장 신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트러스트 5집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가 점점 더 보고 싶어졌다.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설거지는 다 마치고 나서 먼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을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정민에게 물어봤다.


“뭐 다녀오셔도 돼요. 어차피 사장님 곧 오실 거예요.”


“아 그래요?”


“예 사장님은 몇 시에 나가시던 꼭 해질 때쯤 되면 들어오시더라고요.”


“아. 저녁 장사 준비하시려고 그러나?:


“아니요. 오늘 같이 일요일에는 원래 저녁에 사람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도 일찍 들어가고요. 근데 사장님은 요일에 상관없이 그냥 언제 나가든 이 시간이면 와요.”


그때 진짜 거짓말처럼 삼촌이 입구에서 걸어 들어왔다.


“봐봐요.”


“진짜네?”


“뭐가?”


“아니 정민 씨가 삼촌 곧 올 거라고 해서.”


“맞아. 그분이 저녁에 항상 일이 있어서 낮에만 보거든.”


나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시우가 떠올라서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고 쿨하게 카페를 나섰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새 하늘은 이제 짙은 네이비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고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건너서 시우를 만났던 그 벤치로 향했다.


“늦었네요?”


“어?”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분명히 시우를 보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은 맞지만, 오자 마자 그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여기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런데 진짜 여기에 오니 그가 미리 자리에 앉아 있었고, 심지어 그는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뒤돌아 보지도 않고 나의 인기척 만으로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혹시 아까 카페에 왔었어요?”


“아니요.”


“그럼 나한테 뭐 붙여놨어요? GPS 같은 거?”


“설마요.”


“아니 그럼 어떻게 내가 여기 올 줄 알았어요?”


“몰랐죠.”


“알았잖아요.”


“오늘 올 줄은 몰랐죠? 언젠가, 아니 조만간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서 자주 기다렸는데, 멀리서 기다리던 발자국 소리가 들리길래 알아차린 거예요.”


“발자국 소리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걸음걸이가 있어요. 다들 비슷하게 걷는 거 같아 보여도 보폭도 다르고요. 발끝의 각도도 다르고요. 다리의 길이나 두께, 모양도 다르고요. 그래서 좀 신경 써서 들어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어요. 특히, 저처럼 청각이 좀 더 발달한 사람들 에게는요.”


“좋아하는 사람이요?”


“아니 좋아하는 발자국 소리요.”


나는 그가 시치미를 떼며, 발뺌을 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옆에 앉으며 시우에게 물었다.


“제 발걸음 소리는 어떤데요?”


“그쪽 더워요. 밝고 가볍고, 시원시원하고, 덜렁덜렁하고.”


“발걸음에 덜렁거리는 게 들린다고요?”


“그럼요! 그쪽 발걸음 소리는 뭔가 통통거리는 듯한 귀여운 느낌이 있는데, 그게 가끔씩 돌부리에 부딪치거나 발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거든요. 그건 아주 많이 경쾌한 느낌이기도 하고 덜 조심스러운 느낌이기도 하니까요.”


“뭐 여하튼 신기하네요. 근데 이번에는 제가 당긴 거예요. 우리 사이에 실. 삼촌네서 아르바이트하기로 한 거거든요. 방학 동안.”


“그건 모르는 거죠. 누가 당긴 건지. 오늘만 봐도 내가 앉아 있고, 그쪽이 당겨 왔으니까.”


시우의 당겨왔다는 말에 나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히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고, 오늘도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곳에 왔으니, 분명히 내가 당겨진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마음을 조금은 숨긴 채 그와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여전히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고, 약속도 정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방학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 것이라는 것, 그래서 그때까지는 계속 볼 수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먼저 와있었기 때문에 가는 것도 내가 먼저 가기로 했다. 뭐 별거는 아니지만 그가 먼저 사라지고 나서 그가 사라진 곳에서 그의 모습을 찾는 것을 오늘은 왠지 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다시 홍천에서의 날이 밝았다. 나는 일어나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자마자 창가로 달려가 해시계를 확인했다.


“7시가 넘었네?”


나는 부지런히 일어나서 아침부터 준비했다. 삼촌이 운영하는 펜션은 손님들에게 조식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뭐 대단한 요리는 아니지만, 서양식 간단한 조식 뷔페 운영을 하고 있어서 삶은 계란이나 감자 정도는 구워야 했고, 시리얼이나 우유, 식빵과 치즈, 잼도 세팅을 해야 했다. 원래는 이 모든 일을 삼촌의 일이었지만, 삼촌이 어젯밤에 내가 있는 동안은 내가 맡아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었다.


“선아. 삼촌이 연애를 해. 알지?”


“이제 당당하게 연애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축하해.”


“어. 요즘 애들처럼 표현하면 오늘이 2일.”


“우와! 어제부터 사귀었구나. 진짜 축하해 삼촌. 뭐 내가 도와줄 거 없어?”


“있어. 그래서 꺼낸 말인데, 내가 만나는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저녁에는 만날 수가 없거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낮에 제일 바쁘니까. 그래서 선이 네가 아침에 조식이랑 오전 타임을 좀 책임져 주면 내가 점심 피크타임에는 와서 같이 도울께.”


“삼촌 대박이다. 그렇게 좋아요?”


“좋지! 삼촌이 다 늙어서 주책이긴 하는데, 그래도 좀 도와주라. 조카야!”


“콜!”

 

그래서 나는 아침부터 오후까지의 시간을 담당하기로 했다. 펜션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부터 시작해서 오후 피크타임이 끝나고 정리하는 것까지 일을 하기로 했고, 정민은 오전 10시에 출근을 해서 저녁 9시까지 근무를 하기로 했다. 삼촌은 가장 바쁜 시간 때인 11시부터 2시까지는 도와주기로 하고, 저녁 6시부터는 나와서 마감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근무 스케줄을 짤 때, 나는 왠지 시우에게도 스케줄에 대한 부분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그런 것을 물어볼 만큼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연락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내가 낮시간에 일을 하기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쉬움이나 불안함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시우를 만난 것은 항상 저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펜션 손님들을 위한 조식을 준비했고, 8시부터 카페로 내려오기 시작한 손님들은 9시 반이 넘어서야 모두 숙소로 돌아갔다. 그 남은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마침 정민이 출근을 해서 우리는 함께 정리를 하고 낮 장사를 준비했다.


월요일이었지만,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이 왔다. 10시 반부터 들이닥치기 시작한 손님들은 11시가 조금 넘어가자 15개 정도 있는 모든 테이블을 다 채웠고, 그때쯤 허겁지겁 삼촌이 카페로 들어왔다. 삼촌은 뭔가 상기된 얼굴로 카페에 들어서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고객들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꽤 오래 같이 일한 정민과 삼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들을 해냈고, 이 카페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 경험 자체가 많지 않은 나만 혼자서 여기저기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주로 손님들이 먹고 간 테이블을 정리하거나, 음료를 만드는데 부족해진 재료들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테이크아웃 컵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정민이 나에게 컵을 채우는 것을 부탁했다.


“저기요. 테이크 아웃 컵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 키 들고 뒷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돌면 지하 창고가 있어요. 거기서 우선 손에 들 수 있을 만큼만 가져다주실래요? 나머지는 제가 이따가 채울게요.”


솔직히 정민의 말을 듣고, 순간 움찔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다 괜찮아졌다고 이야기해도 지하 창고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정민이 나에게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삼촌을 보게 되었는데, 삼촌은 이미 밀려있는 주문을 쳐내느라 나에게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그 순간에 정민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할 시간도 없었고, 나 역시도 내가 가지고 있는 폐소 공포증을 핑계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다.


키를 들고 뒷문을 나와 막상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자, 심장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하 창고는 완전한 지하실은 아니어서 지하실 계단 옆으로 한 뼘 높이의 작은 창들이 있었다. 그 창을 통해 지하실을 들여다보니 그래도 그런 창들이 많이 있어서 지하는 생각보다 밝았다.


창문을 보자 마음이 좀 놓인 나는 천천히 그 계단 밑으로 들어갔고, 자물쇠를 열고 문을 열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줄기에 하얀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순간 재채기를 몇 번 하고는 컵을 찾기 위해 창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넓었지만,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선반들 때문에 공간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선반에서부터 테이크아웃 컵을 찾기 위해 박스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넓은 공간과 작은 창들에서 들어오는 햇빛들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컵을 찾을 수 있었다. 3번째 선반에서 컵을 찾은 나는 컵을 한 10줄 정도 품에 안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문으로 걸어가는 순간 문에서 뭔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어? 누구세요?”


뭔지도 모르는 소리에 순간 겁이 나기 시작한 나는, 컵을 그대로 떨어트리고는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분명히 열려있어야 하는 문은 닫혀 있었고,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까 문을 열던 장면을 떠올려보니 이것은 누군가 밖에서 자물쇠를 일부일 잠근 것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에 검은 야상의 사람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 정말 영화처럼 한쪽부터 작은 창들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하실의 4면을 통틀어 10개도 넘게 있었던 작은 창들은 한 방향으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밖에서 일부러 창을 하나씩 가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창이 하나씩 사라질 때 심장이 점점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 숨은 점점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마지막 창이 사라지기 전에, 잠시 그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 같은 실루엣이 보였는데, 나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야상을 입고 있는 사람의 다리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어두운 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막기 위해 서있는 사람은 당연히 역광이기 때문에 검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벌써 오랫동안 검은 야상을 입은 사람에게 스토킹을 당해 온 나의 입장에서는, 그가 검은 야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검은 야상의 실루엣을 마지막으로 모든 빛이 사라진 지하창고에 홀로 남은 나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켤 용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굳은 채 나는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찾으러 올 거야. 너무 오래 안 오면 분명히 찾으러 올 거야.”


나는 너무 공포스러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잘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삼촌이, 그리고 정민이 나를 분명히 찾으러 올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삼촌이나 정민이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상하게 계속 시우의 얼굴이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서 인지, 왠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삼촌도, 정민도 아닌 시우일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었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서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과거의 그 냄새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꿉꿉하면서도 뭔가 비릿한 그 지하실의 냄새, 지금 내가 느끼는 그 냄새가 그 냄새인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에 그 과거의 이미지가 떠오르자, 나는 내가 마치 타임슬립이 되어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 순간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그 순간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온 것이 아닌가라고 느낀 것은, 그 순간 그때처럼 어디선가 그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악이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떠올리던 멜로디여서 그런지, 나는 너무 익숙해서 마치 그 멜로디가 그대로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때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숨을 조금씩 쉴 수 있었고, 온몸의 떨림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서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었다.


“안녕”


나는 진짜 내가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허공을 향해 그때처럼 인사를 해봤다.


“안녕”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몇 번을 해봐도 내 인사에 답은 들리지 않았고, 나는 대답이 없는 고요함에 문득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공간은 마치 나의 슬픔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멜로디를 여전히 내 몸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한쪽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 빛이 마치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소름이 끼치고 불쾌할 뿐이었다. 나는 나를 훔쳐보는 눈빛이 기분 나빠서라도 여기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앉은 채로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00번을 넘게 두드리자 갑자기 창문이 사라졌을 때처럼 창문들이 하나씩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문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하자 다시 모이지 않던 지하실의 공간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창문이 다시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아 허겁지겁 달려오는 삼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삼촌의 발걸음 소리를 유심히 듣게 되었다.


“정말 삼촌 같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삼촌이 걱정하지 않게 옷에 뭍은 먼지들을 털어냈고, 그 먼지가 허공에 뿌옇게 안개를 만들었을 때, 삼촌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의 몸부터 여기저기 살펴보았고, 나는 그런 삼촌의 손은 꼭 잡으며 삼촌을 안심시켰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렇게 이쁜 조카가 갇혀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선이 다 컸네!”


삼촌의 그 한마디에 나는 뭔가 울컥했고, 삼촌은 그 말을 하기 전부터 눈에 눈물이 그득했었다. 그 안에서 있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나는 길었던 시간에 비해 훨씬 괜찮았다. 나는 그냥 왠지 갑자기 시우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올라가서 좀 쉬라는 삼촌의 말에 나는 미안하지만 잠깐 나갔다 온다는 말을 하고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호수에는 저 멀리서 비추는 햇빛을 온전히 받고 있는 시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 그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를 꽉 안아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내 온몸을 그의 두 팔이 꼭 잡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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