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네 살이 되었다. 말은 이미 비정상회담에 나오는 그 어떤 외국인들보다 더 잘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는 아빠와 엄마의 말투를 따라 하며 적절한 나름의 논리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동영상 그만 보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아기 상어는 못 봤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하지만 아까 약속했잖아요. 이것만 보고 그만 보기로."
"그래도~"
아이는 이제 우리와 대화를 하면서도 모든 상황과 문장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스치듯 말했던 아빠 엄마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자신이 대화를 하거나, 혼자 역할극 놀이를 할 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진짜 말조심해야겠다."
"그러니까. 다 듣고 있네."
언젠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의사의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어 보여, 밥을 먹으면서 우리 아기는 나중에 커서 의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흘러가듯 말했는데, 아이는 요즘에 한참 빠져 있는 의사놀이를 할 때마다 나에게 묻는다.
"아빠는 내가 의사 선생님 되는 거 싫어?"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야. 안 싫어."
"그냥 해본 말이야? 난 의사 선생님 되고 싶어."
아이는 그렇게 아주 빠르게 말을 익혀가고 있고, 워낙 밥도 잘 먹는 아이라 신체적으로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인지력과 감정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숫자와 요일에 대한 개념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다름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말해주고, 엄마 아빠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 지도 궁금해한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도 분명해졌는데, 이제는 그날 자신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는 한다.
"오늘은 떡국 먹을래."
"새우볶음밥에 짜장을 슥슥비벼서 먹고 싶어."
하지만 더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아빠가 하던 말을 따라 하던 수준의 감정표현이 아니라, 이제 자기가 느껴지는 감정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안 좋다.
신난다./재미있다.
화가 났다.
슬프다./속상하다.
아이는 어느새 이런 다양한 감정들을 상황에 맞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가끔은 저 단어들을 장난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곁에서 가장 많이 관찰하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의 감정 변화도 명확하고 그에 따른 표현도 분명하다.
그래서 이제 28개월을 살아가는 이 어린 여자아이의 감정은 어떻게 돌봐주어야 하며, 그 아이에게 어떤 감정의 교류를 해주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고민이, 요즘 우리에게는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폭풍성장 중에도 우리를 가장 놀라게 만들고, 박장대소를 하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의 귀여운 여우짓이다. 상대방에게 관심도 많아지고, 스스로의 감정도 명확해지다 보니, 자신을 위한 다양한 여우짓을 하는데, 다 알고 있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 귀여운 짓이다.
예를 들면 퇴근길에 아이가 동요를 듣는 동안, 아내와 내가 회사에 대한 대화를 하면, 아이는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면서 노래를 크게 부르거나, 아빠와 같이 하자고 한다.
"아빠가 엄마랑 얘기하는 거 싫어?"
"어!"
"O이랑 같이 얘기할까?"
"응!"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나누는 본인이 모르는 이야기가 싫은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웃으며 아이의 일과를 묻고는 한다. 또한 예쁜 옷을 입거나 예쁘게 머리를 묶어준 날이면, 사진을 찍어 달라고도 하고,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하자고도한다.
심지어 최근에 우리가 가장 놀랐던 것은, 아이가 자몽을 처음 먹던 날, 새콤하고 쌉싸름한 그 맛에 놀라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박수를 치며 웃고 좋아하자, 아이는 몇 번이나 같은 표정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지난 주말에 어머니의 생일날 산딸기 케이크를 사 가지고 갔는데, 거기에 올라가 있던 산딸기를 집어 먹더니 그때와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 표정에 우리 모두 너무 즐거워하자 또 몇 번이나 반복했고, 아내는 그 표정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러자 한마디.
"잘 나왔어?"
자신의 표정을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는 점점 더 과장되게 표정을 짓고는 마치 전문 모델처럼 엄마에게 물은 것이다.
아이는 오늘로 우리에게 온 지 849일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이는 젖을 떼고, 걸음마를 배우고, 이유식을 먹더니, 이제는 논리적으로 말을 하고, 귀여운 여우짓도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영악해진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아이는 지금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고, 그에게 가장 큰 세상인 부모에게서 관심을 받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흘려보냈던 수많은 걱정들이 그러했듯이, 누군가에게는 걱정할 일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마저도 분명히 시간이 지나며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요즘 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아이가 우리와 놀 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아이는 밖을 잘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루 종일 우리와 지루하지 않게 놀고 있고, 지칠 만큼 신나게 좋아한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서 그 아이의 말은 우리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행복해. 오늘 행복했어."
"오늘 너무너무 재미있었어."
무엇이 더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금전적인 수익과 사회적 명성,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 그것들을 모두 이뤄나가기 위해, 나는 사회에서 다 커버린 여우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뭐가 더 필요할까?
나에게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가 있고, 나는 그저 이 아이와 내 아내와 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