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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종 Aug 25. 2022

감귤 마켓 셜록 그 두 번째 이야기-9

편지

항상 저녁 8시 반만 되면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장인은 보통 9시가 넘으면 잠이 든다. 그렇게 잠이 들면 여느 농사꾼들처럼 새벽 5시면 잠에서 깨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데, 농번기에는 당연히 해가 뜨는 순간부터 해가 지는 시간까지가 모두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보니 그 패턴에 맞게 신체 리듬도 흘러간다.


 그런데 그런 장인도 가끔은 새벽에 잠에서 깨는 날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문뜩 잠에서 깬 날이고, 다시 잠이 들지 않는 것이다. 어제가 그랬다. 인근에서 정화조 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과수원으로 들어오는 케이블 TV 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TV가 나오지 않았고, 항상 보던 TV가 나오지 않자 저녁을 먹고 딱히 할 것이 없어서 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평소보다 더 일찍 자기 시작해서 인지, 새벽 2시도 되기 전에 잠에서 깼고, 다시 잠들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지만, 한번 떠나버린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괜히 잘 자고 있는 장모까지 깨울까 봐 조심히 거실로 나온 장인은 습관처럼 TV를 틀었다.


“아! TV가 안 나오지.”


장인은 아무런 방송도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어제 케이블 TV선이 고장 난 것을 떠올리게 되었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TV를 끄고서는 할 일 없이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2분 정도의 시간을 보낸 장인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동안 미뤄 놓았던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과수원이건 농사 건 씨만 뿌려놓으면 다 알아서 자라고 크는 줄 알지만, 무언가를 길러내고 수확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단계의 과정들이 있고, 그 과정들마다 생각도 못했던 비용과 노력이 들어간다. 장인은 과수원을 크게 운영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 관리를 아주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않지만, 이렇게 시간이 될 때면, 그동안 들어간 지출들이나, 판매를 하고 벌게 된 수익들에 대한 부분을 정리하는 편이다. 영수증 통에 대충 구겨 넣었던 영수증들을 꺼내서 일자에 맞게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 장인은 그동안 들어간 비료나 영양제. 농약 값이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최근에는 새로 팔기 시작한 샤인 머스켓이 시세도 좋고 판매량도 좋아서 정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낮에 받았던 목돈이 생각났다.


“1000만 원.


지금까지 살면서 1000만 원이라는 돈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한 번에 이렇게 받아본 것은 처음이어서 아직도 좀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다. 장모는 그 여자가 돌아가자마자 그 돈을 들고 은행으로 가서 바로 입금을 했다. 가지고 있다가 애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바로바로 아르바이트비를 줄까도 했지만, 그냥 그런 큰돈이 울타리도 없는 과수원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다만, 그 여자가 돈뭉치를 담아주었던 파우치와 편지가 가득 담겨있는 쇼핑백은 거실 책장 한쪽에 잘 놓여 있었다. 장인은 그 일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쇼핑백에 눈이 갔고, 문득 그 편지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편지를 그렇게 썼지?”


장인은 자연스럽게 그 쇼핑백을 가지고 와서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책장에 있던 파우치를 가지고 와서 그 안에 넣어두었던 100명의 주소가 적혀있는 종이를 봤다. 4장에 걸쳐 빡빡하게 쓰여 있는 누군가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있잖니, 쇼핑백에 담겨 있는 편지의 내용들이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장인은 그저 호기심에 쇼핑백 안에 있는 편지 하나를 꺼내서 들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마치 장인의 마음을 시험이라도 하듯이, 아무런 봉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은은한 파스텔 톤에 아무 무늬가 없는 봉투는 입구가 접혀 있기는 했지만, 접혀있기만 한 것이었다. 장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어서 보고 다시 넣어 놓을 수 있도록.  


장인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 시험시간에 감독 선생님 눈을 피해, 옆에 있는 짝꿍의 시험지를 훔쳐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집에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편지를 열어보는, 전혀 걱정할 것 없는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장인에게는 손이 떨리고, 입이 마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아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은 그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다. 어느새 저 편지를 보지 않으면 오늘 밤뿐만 아니라, 몇 날 며칠을 잠 못 들 것 같다은 강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그 봉투를 열었고,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두 번 접혀 있는 편지지를 꺼내서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큰소리가 났다.


“여보!”


장모가 부르는 소리에 장인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편지를 찢을 뻔했다. 장인은 너무 놀라 심장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장모는 그런 장인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뭐 하는 거예요? 이 시간에 왜 그걸 열어보고 있어요?”


장인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옆에 와있는 장모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을 했다.


“아니. 잠이 깼는데, TV도 안 나오고 심심해서, 그냥 뭐라고 썼나 궁금해서 봤지.”


“그렇다고 남의 편지를 훔쳐봐요? 우리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 편지를?”


“그러니까 보는 거지. 우리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봐봐 이렇게 풀도 안 붙여 놨어. 이건 뭐. 그냥 봐도 상관없다는 거지 뭐.”


“그게 어떻게 봐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냥 실수로 안 붙인 거겠지.”


장모가 말하는 사이에 장인은 그새 잽싸게 쇼핑백에 담겨있는 나머지 편지들을 살펴봤다.


“아니야 봐봐! 아무것도 안 붙여 놨다니까? 그냥 다 허벌랭 해! 뭐 별거도 아니니까 이렇게 준 거 아니겠어?”


“그럼 그 별거 아닌 걸 뭐하러 보려고 그래요?”


“그냥 심심하니까 그러는 거지.”


“아! 몰라요. 당신 맘대로 해요. 난 잘 테니까.”


장모는 도저히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장모는 아는 것이다. 장인이 저렇게 마음을 먹은 이상 꼭 보고야 만다는 것을. 그래서 어차피 말리지도 못하고 기운만 빼느니 차라리 안 보고 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마음으로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 포기하고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 순간, 거실에서 장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장인의 목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장모는 거실로 급하게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편지를 보고 눈이 커져버린 장인이 있었다. 장모는 장인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져다가 봤다. 그리고 자신도 크게 놀라 편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웃으며 인사했다고 다 괜찮아졌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난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어. 처음부터. 다만 살아보려고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이제는 나도 안 되겠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신도 편하게 살지마. 평생 당신의 기억 속을 헤엄치고 다녀 줄 테니까.”


편지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몇 줄의 편지만으로도 그 여자의 깊은 원한과 지독한 저주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 다는 것이다. 게다가 장인과 장모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무서운 편지의 내용보다는 그 편지 끝에 빨간색으로 쓰인 “이지연”이라는 이름이었다. 손가락으로 쓴 듯한 그 이름은 색과 질감으로 봐서, 아무래도 피로 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모는 그 피로 쓴 이름은 보자마자 아까 낮에 그 여자의 손이 떠올랐다. 오른손 모든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던 모습. 장인은 장모가 그 편지를 읽는 동안 퀭해진 눈으로 나머지 편지들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인이 편지를 하나씩 꺼내서 읽을 때마다, 장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렇게 장인이 편지들을 미친 듯이 꺼내서 읽으면 장모는 그가 던지는 편지들을 받아서 읽었다. 그리고 장모의 표정도 장인처럼 점점 더 어두워지고 힘들어했다. 편지의 내용들은 모두 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모두 상대방을 원망하는 말들과 저주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편지에는 어김없이 피로 서명한 그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해신”


“이게 뭐지? 왜 편지가 다 이래?”


장모는 멍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 길래 이렇게 원한이 많아. 그리고 그 원한을 다 하나하나 이렇게 적냐고. 더 아프게.”


“도대체 그 속을 어땠을까. 100가지 원한을 품고 사느라 그 맘은 얼마나 망가졌으려나.”


“그래서 그런 거야. 처음 왔을 때부터 눈빛도 안 보여 주고, 냉랭한 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겠지. “


“그래도 몇 년 좋았잖아요. 우리 포도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요 몇 년은 와서 잘 놀고, 잘 웃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데 어째 불안 불안했어. 올해는 안보이길래. 다른 손님들이야. 안 보이면 윗동네 대흥농장 갔겠지 생각하고 마는데, 걔는 왠지 자꾸 걸리더라고. 무슨 일이 있나? 왜 안 오나? 자꾸 신경이 쓰이던 게, 결국은 뭔 일이 있었던 거구만. 올해.”


“이제 어째요? 이 무서운 편지를 주인들한테 보내요? 아니면 그이 찾아서 설득이라도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보낼 건 보내야지!”


“뭐요? 이 편지요?”


“아니! 미쳤어? 혹시 이런 거 보냈다가 걔가 무슨 고소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그래!”


“그럼요?”


“우선 포도는 보내고! 편지는 상의를 좀 해야지..”


“누구랑요?”


“누구긴 누구야. 애들이지! 아마 고놈들이 나보다는 잘 처리하겠지. 그러니까 편지들은 내일 가족끼리 상의를 좀 해보자고.”


“우선 알았어요.”


장모는 장인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자연스럽게 편지를 하나씩 봉투에 넣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이름이 없어서 솔직히 좀 곤란하기는 했지만. 하다가 보니 우선 편지지와 편지봉투의 색깔에 짝이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그렇게 펼쳐진 편지들을 봉투에 담아 다시 쇼핑백에 넣으려고 하는 데, 그 쇼핑백 옆면에 끼여있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여보 여기 안 열어 본 편지가 하나 남았는데요.”


장모처럼 편지를 조심히 넣고 있던 장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짓으로 알아서 하라고 했다. 장모는 지금의 모든 편지가 그러했듯이 그 편지에도 심한 저주의 말이 적혀 있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 편지를 꼭 읽어봐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장모가 열어 본 편지에는 처음으로 피로 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고, 내용도 다른 편지들과는 달랐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장모는 피글씨도 없는 편지지에 아주 짧게 담긴 고마움과 미안함의 편지가 왠지 더 울컥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면서 그래도 100통 중에 고마운 마음을 전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이 편지만큼은 꼭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받을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봉투를 돌려 앞면을 보니 거기에 다른 이름들보다는 저 정성스럽게 쓰인 이름이 있었다.  


“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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