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The Piano 1993)

-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마음의 음

by 이한

뉴질랜드의 거친 해안. 짙은 안개와 파도가 밀려드는 갯벌 위에,
거대한 짐짝처럼 놓여 있는 한 대의 피아노.
말하지 못하는 여인, 에이다는 그 피아노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
그녀에게 그것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이었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말을 잃었지만, 피아노를 통해 마음을 말했고, 소리를 낼 수 없는 대신
건반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았다.


그러나 그녀의 피아노는 남편 스튜어트에겐 짐에 불과했고, 해안에 방치된 채 버려지듯 남겨졌다.
그녀가 진짜로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바로 피아노를 대신 들여다본 남자, 베인즈였다.
그는 피아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피아노를 치는 그녀를 이해하고자 했다.


베인즈의 집에서,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마주하고, 조심스레 손을 얹는다.
그리고 흐르기 시작한 한 곡. Michael Nyman의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

고요하고도 절절한 그 선율은 말보다 선명하게, 그들의 욕망과 외로움을 안고 흐른다.


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그저 건반을 치며, 자신의 욕망과 자유, 슬픔과 기쁨을 다 꺼내어 놓는다.
그녀의 피아노는 삶 전체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 그녀의 손끝에서 흐른 말 >

나는 입을 닫고
피아노를 열었다.

말이란, 반드시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건반을 짚는 손끝, 음을 고르는 망설임, 흐르다 끊긴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나를 말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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