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는 왜 사라졌고, 고구려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 고대 역사는 아직도 논쟁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므로 제가 정리한 내용이 언제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 알려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는 거대한 공백 상태가 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나타난 나라가 부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고구려였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고주몽은 왜 따뜻하고 비옥한 남쪽이 아니라,
춥고 척박한 북쪽 만주로 향했을까?”
우리가 막연히 ‘고구려는 원래 북쪽 나라’라고 생각해 온 그 사실은 사실 매우 복합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부여, 전통을 품었지만 한계를 드러낸 나라
고조선 이후 북방 지역에서 등장한 부여는 귀족 중심의 정주 농경 국가였다. 왕권은 약했고,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조차 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지 않았다. 이렇듯 부여는 방어력이 약한 정치 구조였고, 이처럼 느슨하고 위계적인 체제는 격동하는 북방 세계에서 생존하기엔 취약한 방식이었다.
고주몽, 체제를 버리고 방향을 바꾸다
고주몽은 부여 내부의 정치 갈등 속에서 밀려나 국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졸본이라는 지역에서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 그 공동체가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의 이동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전략적인 재설계였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정주형 귀족 사회가 아니라, 기마 전투와 민첩한 대응을 핵심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다. 말 위에서 싸우고, 유연하게 결속하며, 스스로를 지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왜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왜 고주몽은 남쪽 한강 유역같이 따뜻하고 비옥한 땅으로 가지 않았을까?”
그 질문엔 여러 겹의 대답이 있다.
1. 정치적 이유
고조선 멸망 후, 한나라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네 군을 설치하며 이 지역을 직할 통치 구역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는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 인근, 나머지 군도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한사군 체제는 한반도 중북부를 한나라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만들었고, 남하하려는 외부 세력에겐 명백한 위험 요소였다.
2. 위치에 대한 논쟁
다만, 이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 내 논쟁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이덕일 선생님과 같은 비판적 학자들은
“한사군은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동에 있었다.
평양설은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입장을 따르더라도, 남쪽이 한나라의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즉, 한사군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든, 남쪽은 안정된 개척지가 아니라, 외세와 복잡하게 얽힌 공간이었다.
3. 생존 방식의 적합성
고구려는 기동력 있는 군사 공동체였고, 말을 타고 이동하며 전투하는 구조에 적합한 땅이 필요했다.
만주와 압록강 유역은 기마 민족의 생존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한강 유역처럼 벼농사 중심의 평야보다,
고구려의 조직 형태에 더 맞는 공간이 북쪽에 있었다.
4. 문화적 단절과 새로운 출발
고주몽은 단지 권력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부여 체제 자체에 대한 거부와 단절의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기존의 질서와 상징에서 벗어나 스스로 중심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 정치적 상상력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주몽이 "북쪽"을 택했다는 것은 한나라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 곳을 택했다기보다는, 한나라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군현 지배를 피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덜 통제된' 지역을 택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낙랑군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직접 통치하고 세금을 거두며 행정력을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현도군이 이전하여 직접적인 압박이 줄어들고,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자체적인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변방의 자율적 공간'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이처럼 한나라의 영향권과 경계 지점에서 투쟁하며 성장하는 국가가 된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좋은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고주몽이 택한 졸본(압록강 중류)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러한 지형은 한나라 군대의 대규모 진격을 어렵게 하고, 고구려가 스스로의 방어력을 구축하기에 유리했다. 또한, 이 지역은 부여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 있으면서,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력이 미치기 어려운 변방 지대였기에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부여는 느슨한 질서를 지키려 했고, 고구려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 선택이 고구려를 살렸고,
삼국 중 가장 먼저 제국의 외형을 갖춘 국가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모든 선택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모든 도망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주몽은 도망쳤지만, 동시에 결단했다. 비옥한 땅을 포기하고, 지배받지 않는 척박한 땅에 자신만의 나라를 세운 것.
그 결정은 지금도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지켜야 할 질서를 따를 것인가,
새롭게 설계할 용기를 가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