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복의 이름으로 지켜낸 것들
우리는 광개토대왕을 '정복 군주'로 배운다. 19세에 즉위해 39세에 죽기까지, 단 20년 동안 거침없이 주변국을 정벌하며 고구려의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다.
북쪽으로는 만주 벌판을 넘었고,
남쪽으로는 백제를 굴복시켰으며,
동쪽으로는 일본열도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그는 왜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가야 했을까?
정말 모든 것을 가지려 한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 걸까?
고구려는 고립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는 사방이 적이었다. 남쪽엔 백제, 동남쪽엔 신라, 북쪽엔 거란과
말갈, 서쪽엔 후연, 바다 건너엔 왜(일본열도 계열의 해적과 침략 세력).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는 건,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형(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에게 피살당한 상태였다. 왕이 적국에서 전사한, 말 그대로
치욕적인 과거. 그건 한 왕조에게 기억해야 할 분노이자, 지워야 할 수치였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은
이 상처에서 시작된다.
정복은 공격이 아니라 선제 방어였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했다. 그는 임금을 죽인 백제를 용서하지 않았고, 압박을 통해 신라를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그리고 후연의 내분을 틈타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국경을 밀어냈다. 그의 정복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국경 바깥으로 위험을 밀어내는 행위’였다. 위협은 가까이에 있을수록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그는 국경의 개념 자체를 바꿨다.
“우리 땅을 지키려면,
먼저 저들의 땅을 움직여야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왜 세워졌는가
그가 남긴 가장 강렬한 유산 중 하나는 ‘광개토대왕비’다. 장수왕이 세운 이 비는 단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아니라, 정복과 기억의 정치적 선언이다.
비문에는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고, 고구려가 군사를 파견해 신라를 지켜주었다.”
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구절은 고구려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보호자의 역할을 했다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그건 단지 전쟁이 아니라, ‘정당한 개입’이었다는 자기 정당화다.
정복의 영광, 그 이면의 불안
하지만 확장은 늘 위기를 동반한다. 너무 넓은 땅, 너무 많은 적, 너무 짧은 평화.
광개토대왕이 죽고, 아들 장수왕이 왕위를 잇는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하정책을 강화했고,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그 확장은 곧 신라와의 충돌을 낳고, 고구려는 점점 중앙집권은
강해졌지만, 외교적 고립은 깊어졌다. ‘광개토’는 ‘넓은 땅을 연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넓은 땅’은 항상 넓은 마음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광개토대왕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1. 정복보다 중요한 건 “안전지대를 확장하는 전략”
광개토대왕은 단지 욕망으로만 땅을 넓힌 건 아니다. “우리의 국경이 곧 위험지대다”라는 감각 아래
적을 밀어내고 ‘위험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국방적 확장’을 택한 것이다. 오늘날의 조직·국가·개인 모두에게도
“불안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구조적으로 밀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2. 정복이 아니라 ‘기억을 남기는 방식’의 중요성
광개토대왕의 정복은 그의 죽음 이후, 그 아들 장수왕에 의해 비석으로 새겨졌다.
정복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돌 위에 세워졌다. 단지 승리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복의 정당성과 명분을 역사로 남기기 위한 정치적 기억 설계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사실 기록’이 아니라, “고구려가 어떤 나라로 기억되고 싶은가”에 대한 편집된 메시지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성과 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기록되고 해석되느냐가 더 오래간다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역사는 승리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3. 확장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라는 감각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더 멀리 나아갔지만, 그만큼 외교적 고립과 내부분열은 커졌다.
확장은 성취이기도 하지만, “유지해야 할 새로운 부담”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넓힐 줄 아는 것만큼 버티는 구조를 설계할 줄도 알아야 한다.
광개토대왕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단순한 ‘힘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넓히는 것만이 옳은 것인가? 기억될 만한 방식으로 당신은 움직이고 있는가?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그 물음 하나하나가 오늘의 전략, 오늘의 인간관계, 오늘의 리더십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