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쩌다 나 혼자만 진지한 날

– 교향곡을 틀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by 이한

오늘 아침, 유튜브에서 우연히 교향곡 하나를 틀었다.
말러의 교향곡 5번.

영혼이 껴안기는 듯한 현악기.
나는 괜히 창밖을 봤다.
광각 카메라도 없는데 말이다.


그 순간, 뭔가 ‘존재’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내리고,
차분히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무려 제목이 《삶과 죽음 사이의 침묵에 대하여》
나는 뭔가 대단한 걸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30분 뒤
나는 쿠팡에서 “논슬립 양말”을 검색하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틀고,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엔 진짜였다.


현악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마치 우주의 숨소리를 들려주려는 그 순간—
위잉—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계는 조용했지만, 내 몰입은 박살 났다.

아무리 명곡이라도, 먼지 센서 앞에선 작아진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인생 같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자꾸만 진지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수업 중에도,
심지어 편의점 삼각김밥을 고르면서도.

하지만 뭔가 다 어긋났다.
내가 진지한 순간에
세상은 하나도 같이 진지해주지 않았다.


말러의 교향곡은 지금도 재생목록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걸 들을 때
항상 그 ‘위잉’ 소리를 먼저 떠올린다.
클라이맥스도, 영감도 아닌
그냥 공기청정기의 성실함.


그래,
세상은 그렇게 나를 진지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웃기로 했다.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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