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룩하게 살기로 했던 날, 범퍼를 긁었다

by 이한

오늘 새벽, 나는 거룩하게 살기로 다짐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
차가운 공기마저 왠지 경건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늘은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으로 살겠다.”


그리고 3시간 뒤—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끼이익—
벽과 내 차 범퍼 사이에서
거룩함이 쭈욱— 미끄러져 나갔다.


그 순간 나는,
베드로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믿음을 저버렸다.

“아X…!”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저주 같기도 한
현대적인 단어들이 쏟아졌다.

내 손은 스티어링 휠을 쥔 채로 벌벌 떨었고,
심장은 1.5배속으로 영적이지 못한 비트를 쳤다.


나는 차에서 내려
범퍼에 손을 대보았다.
기스.

아주 길고, 아주 선명한,
마치 나의 미완성된 성품처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방금까지 다짐했던 그 말을 떠올렸다.

“부드럽고… 인자하게…”


그리고 다시 조용히 말했다.

“아, 모르겠다.”


그날 하루 종일,
내 거룩함은 범퍼 한쪽에 걸려 있었고,
나는 그걸 한 번 쳐다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웃었다.


신앙도, 인내도,
가끔은 이런 걸로 시험당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깨달았다.

거룩함은 새벽에 다짐하는 게 아니라,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거였구나.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범퍼가 먼저 말해버렸다.

keyword
이전 05화4. 어쩌다 나 혼자만 진지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