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제 습관처럼 2시간마다 한 번씩 일어났다. 그녀가 나를 조금만 건드려도 눈이 떠졌다. 침대 밖으로 발을 뺀 것인데도 잠이 깼다. “식사 나왔습니다.”하는 명랑한 소리가 들리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무화과를 먹고 양치를 했다. 병원을 학교 같이 적응했다. 그녀는 밥을 잘 먹지 못하는데다 괄약근에 힘도 없어서 좌약을 넣어도 용변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띄엄띄엄 볼일을 봤다. 오늘은 두 번의 어려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수희가 좌약을 넣고 한 시간 있다가 소변기에 볼일을 보려고 했다. 나는 간호사의 당부가 생각나서 그녀를 화장실에 데려가려고 휠체어를 가져왔다.
“간호사가 병실 안에선 냄새 때문에 안 된다고 했어.”
수희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기가 죽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했다. 두 사람은 환자였고 두 사람은 보호자였다. 다행히 모두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며 이해했다. 누군가 교양 없는 짓이라고 난색을 표할까봐 두려웠었다. 죽어도 못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이제 이런 것도 부탁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와 소변기를 꺼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 진짜 답답하다.”
경직된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약간 쉬었다.
“너는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다 말하고 다녀. 안 된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신경질적인 눈빛에 나는 조금 겁을 먹었다. 소변기에 용변을 받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느라 세면대 앞에 잠시 서있었다. 실업자가 된 기분이었다. 통증이 그녀를 조각낼수록 예민해졌다. 스스로 이상한 반성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두 번째 사건은 점심시간쯤이었다. 두더지 할머니한테 면회가족이 왔다. 이번엔 남편이 아니라 딸로 보이는 한 중년 여자였다. 그녀가 또 다시 신호를 느꼈다. 그녀는 꾹 참았다. 울기도 하고 침대를 주먹으로 콩콩 쳤다. 미안했다. 내가 그녀만큼 질병에 신음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나의 이해 안에서 민폐라고 눈치를 줬다. 나는 휠체어를 가져와 화장실에 가자고 했다. 휠체어에 그녀를 앉히는데 두더지 할머니의 딸이 침대 위에 있던 링거팩을 말없이 빼주었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녀를 번쩍 들어 변기에 앉혔다. 속옷에 용변이 조금 묻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내가 그녀를 눕힐 동안 그 중년 딸이 링거팩을 말없이 꽂아주었다. 두더지 할머니는 자고 있었고 중년 딸은 그 옆에 앉아 그녀를 고요하게 보았다. 세탁실까지 뛰어가서 환자복을 ‘오염 세탁물’이라고 적힌 커다란 통에 넣었다. 간호사실에서 수희의 환자복을 새로 받았다. 캐리어에서 수희의 속옷을 새로 꺼냈다. 간호사가 커튼 사이로 약을 놓고 갔다. 나는 이제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감정을 곱씹지 않고 다음에 올 낱말을 고르듯이 할 일을 차근히 배열했다. 중년 딸한테 고맙다는 의미로 커피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왔는데 여자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저녁 여덟 시. 수희는 밤에 자지 못한 잠을 몰아서 자고 있었다. 두더지 할머니가 커튼을 치고 구부정한 허리로 다가왔다. 나는 휴대전화를 끄고 일어났다. 두더지 할머니는 덜그럭거리는 발음으로 물었다.
“어머니가 어떤 병이 있어?”
“가슴에 암이 있어요.”
두더지 할머니는 계속 질문했다.
“언제부터 아팠어?”
“칠 개월 전부터요.”
“암이 어느 정도 커졌어?”
“목뼈까지 전이됐어요.”
“아버지는 어디 있어?”
“…… 아버지는 안 계세요.”
두더지 할머니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보호자 침대에 앉으려는데 두더지 할머니가 다시 왔다. 손에 든 흰 봉투를 내 손에 집어넣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힘이 내 손에 전달되었다. 나는 완강히 밀어냈으나 두더지 할머니는 침대에 두고 바로 자리로 갔다. 유일무이한 위로가 차올랐다. 봉투 안에는 오만 원권이 네 장 있었다. 그리고 하얀 봉투 뒷면에는 ‘선생님의 쾌유를 빕니다.’라고 적은 문장이 있었다. 중년의 딸은 제자였다.
나는 편의점에 가서 유리병에 담긴 따뜻한 베지밀과 무화과 한 팩을 샀다. 무화과를 씻어서 꼭지를 잘라 일회용 그릇에 담았다. 두더지 할머니는 수달처럼 성경책을 배에 올려놓고 보고 있었다. 두더지 할머니는 손사래 치며 자기는 베지밀만 받겠다고, 무화과는 가져가서 어머니랑 먹으라고 했다. 실랑이하기 싫어서 말없이 손이 닿기 쉬운 서랍장 위에 무화과를 올려두었다.
수희는 자기 전마다 요거트를 먹었다.
“너는 간식 때문에 여기 있는 거지? 하긴, 간식 때문에 있는 게 어디야.”
나는 요거트 위에 잘게 썬 무화과를 올려 먹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먹었다. 수희의 입에 무화과를 넣어주고 그 다음 내가 먹었다. 그런데 씹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수희가 한 번 먹을 때 나는 두 번 먹었다.
“환자가 먹어야 하는 걸 네가 다 먹네. 죽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거냐?”
그녀는 그런 말을 웃으면서 했다. 내가 요거트 한 숟갈을 입에 넣어주면 거절하지 않고 먹었다. 나는 그녀가 죽을 거라 당연히 예상하면서도 감히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는 걸 여러 번 상상해본 적 있었는데 그건 다 불가능하다는 걸 은근히 전제했다. 시나리오였다. 그녀가 죽는 것을 하루하루 목격하지만 죽음이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희는 내 얼굴을 자주 보았다. 내가 그녀 옆에 앉아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여줘도 메모장에 일기를 쓸 때도.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그녀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말을 낭비하지 않으려 공들였다. 손톱깎이를 들고 그녀의 긴 손톱을 잘라주었다.
“넌 참 착해. 나는 우리 엄마 아플 때 공원에 버린 쓰레기처럼 ‘누군가가 치우겠지’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낫겠지’라고 안일하게 지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너 손 줘봐.”
나는 손톱깎이를 내려놓고 왼손을 그녀의 손 위에 포갰다. 그녀는 내 손을 만졌다. 하루하루를 세듯이 손가락을 더듬고 멀리 있는 가능성을 헤아렸다. 서로의 부분적인 맨몸에 잠겼다. 다정한 살갗이 만나 서로의 머뭇거림이 드러났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녀는 내 손등과 손바닥을 유심히 보았다. 손금, 손마디, 피부.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손을 삼켰다.
“좋겠다. 어려서.”
“난 싫어.”
“어릴 땐 모르지.”
숨죽여 녹아버리는 먹먹함. 금세 번진다. 서서히 뒤엉킨다. 여전히 손은 이곳에 잘 있었다. 그녀는 깍지를 꼈다.
“나 말고 누구랑 손 잡아봤어?”
“안 잡아봤어.”
그녀는 자기의 오른손을 들어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시늉을 했다.
“언젠가 네 손을 누군가 이렇게 만지겠지?”
손이 떨어졌다. 한 뭉텅이의 머리카락처럼. 내 손 안에 있던 카스텔라를 잃어버렸다.
“고통에도 배울 수 있는 게 있지만 그래도 너무 아파. 이젠 싫어. 강한 척도 못 하겠어. 고통이 나를 끌고 가는 기분이야.”
수희는 흐느꼈다. 무심히 흐르는 눈물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녀는 소용돌이쳤다. 추락하는 그녀의 마음과 더 높이 자라는 나. 안전하게 그녀를 안았다. 내 귓가에 뚜렷하게 가라앉는 차가운 울음과 호흡. 죽음의 무게는 무력해지고 우리의 포옹은 세다.
몽정
지구를 덮은 국화천국에서 자는 우리. 드림팝이 흘러나오는 여름. 나는 눈을 천천히 뜨고 손을 뻗어 꽃 사이를 머리카락처럼 더듬었다. 탁상시계가 잡히고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검은색 수트를 입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그녀는 빨간색 꽃 원피스에 흰색 카디건을 입고 맨발로 다녔다.
그녀는 내 배 위에 머리를 베고 시집을 읽었다. 우리는 엎드려서 그림을 그렸다. 거기에 우리의 얼굴은 없었다. 아기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인어공주가 그려진 8칸 국어 공책을 벽에 대고 글씨를 썼다. 쓰고 지운 이름들이 엄청 많았다. 우리는 태양을 끄고 손전등을 하늘에 쏘았다. 하늘 뒤에 있던 금붕어들이 하늘 위로 부드럽게 지나다녔다.
캔디가게는 또 다른 식물원. 스윗한 가든. 나는 입에 애벌레 젤리를 물고 투명한 스푼으로 알록달록한 젤리를 푹 펐다. 손바닥만한 비닐봉지에 가득 담았다. 그녀는 가게 앞, 낡은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웠다. 캐셔가 포장할 동안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렸다. 카운터에 배를 대고 팔짱 낀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입에 젤리를 한가득 물고 양손에 봉지를 들고 나왔다.
풀이 우거진 곳에 ‘welcome’이라 적힌 작은 매표소만 불이 켜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웃으며 그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시집을 읽다가 찢은 조각을 내밀었다. 매표소에서 나오는 건 국화 한 송이. 덤불이 가득한 장미정원에 국화 한 송이를 심었다. 별을 보고 누웠다. 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베고 그녀가 입은 카디건은 내 몸 위에 있었다. 나의 재킷은 그녀의 몸 위에 있었다. 우리는 손을 하늘에 뻗어 뜨개질 놀이를 했다. 실도 없이. 별과 두 손 가락이 섞일 때마다 우리는 웃었다.
푸른 새벽이 가라앉고 먼 시골의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양옆에 논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재킷을 허리에 묶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나는 그녀의 카디건을 망토처럼 목에 묶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며 걸었다. 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자 그녀는 조용히 웃음을 짓는다.
나는 다 안기 힘든 국화다발을 한 아름 품고 그녀 뒤를 따라갔다. 국화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다 흘렸다. 나는 얼굴을 꽃무더기 속에 폭 숨겼다. 그녀는 나와 계속 입을 맞추면서 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발밑엔 떨어진 국화들이. 그녀의 빨간 원피스를 위로 올렸다. 그녀도 내 셔츠를 풀어 내렸다. 그녀의 원피스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거품처럼 손에 쥐고 있었다. 시폰에 구름처럼 뭉개지는 목소리.
우리는 노인이 되었다. 창문에 눈송이가 붙고 한기가 감돌았다. 허밍으로 가득찬 방. 하얀 침대 위에서 흰 이불을 함께 덮은 연인. 나체로 마주본 채 누웠다. 나는 조금 내려와서 그녀의 가슴팍 앞에서 눈을 감고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숨을 고르게 쉬었다. 우리 사이엔 같은 향이 났다. 땀에 젖은 흰머리는 이슬처럼 빛났다. 그녀는 내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우리의 낡은 손이 빛에 비쳤다. 그녀의 가슴에 있던 암은 나무껍질처럼 주름졌다. 나는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가슴팍에 머리카락을 간지럽게 비볐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 봤다.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다.
7
나는 울고 있었고 아래는 축축했다.
휴대전화 시간을 보니 아침 여섯 시 오십 오 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한 번도 깨우지 않았다. 보호자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확인했다. 그녀는 깨어있었다. 턱에 오른손을 대고 천장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보자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속옷을 가방에서 새로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침을 먹은 후, 나는 병실 안에 있는 세면대 앞에서 무화과를 씻었다. 매일 바닥을 닦는 청소부가 내 뒤로 와서 여기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조금 싫증이 났다.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저 버린 적 없어요.”
“누구라도 다 말하는 거예요. 그쪽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꾸 버려서. 안 버리셨으면 상관없는데.”
그들의 직업정신이 나에게 모욕적이라고 느꼈다. 이곳은 부티크 매장도 아닌데 그만한 규율을 기대하고 있었다.
수희는 나한테 간병인 있는 병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간병인 병실은 3인실이었다. 본관 7층 775호. 일반 4인실보다 가격이 높으니 호텔 객실처럼 질이 달라질 줄 알았다. 그곳엔 뼈 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버려진 화초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삽관 때문에 말을 할 수 없고 호흡기로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 여기 있다간 완전히 바싹 말려질 것 같았다. 성인용 기저귀를 한 곳에 버리는 간병인한테 다가갔다. 내가 3인실 병실을 확인하러 왔다고 하니 간병인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1, 2호실 자리 비었어요. 여기는 좀 비싼 곳이고. 거기 가보세요.”
간병인이 말한 곳은 6인실이었다. 나는 3인실을 말한 건데 왜 6인실로 보내는지, 기분이 언짢았다. 수희에게 돌아와 이 이야기를 해주니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일반 3인실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복도로 나가 비어있는 3인실을 발견했다. 간호사실에 와서 842호가 비었는데 수희가 갈 수 있냐고 하니 간호사는 또 너냐는 말투로 남자 환자가 들어간다고 대꾸했다. 내가 잠깐 머뭇거리니 간호사는 같은 말투로 재차 말했다.
“남자 환자가 들어간다고요.”
여기선 멀쩡한 나까지 환자취급을 받았다. 나를 마치 자기 강의만 듣는 줄 알고 하루에 에세이 5000자 숙제를 내주는 교수를 보듯 원망의 눈길로 보았다. 하루에 백여 명의 환자가 오고 살려야 하는 의무를 직업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들. 죽음은 하루 여덟 시간 근무시간에 지나가는 일상사였다. 나는 굴욕감을 안고 수희한테 왔다. 선생님께 혼나고 들어온 아이처럼. 그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녀가 묻자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투정을 부렸다.
“네가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자기들이 뭐라고 환자 취급을 해?”
억울하고 비참하고 싫었다. 어차피 죽을 거, 무슨 가치를 두냐는 식의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벌써 불결한 시체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 환자 맞아.”
내 고통은 극진한 무덤. 그래서 자살을 하나보다. 입으로 뱉기엔 창피하고 하나 뿐인 온몸으로 단번에 말하고 싶을 때. 누군가는 참아내는 무게가 나한테는 과적이 되어 잠기는 일들을.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가벼워지려면 딱딱하게 굳어가는 숨을 끌어올려야 했다. 누군가 볼 수 있도록. 하지만 이미 이 바다엔 나 말고도 구조를 요청하는 부유물이 많았다. 그리고 이미 저 아래로 가라앉은 시신들. 이건 다 누가 가져가는가. 살려달라는 말로 오염된 바다.
석식 먹기 20분 전. 그녀가 처음으로 복도에 한 번 나가보고 싶다고 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주었다. 링거팩을 휠체어 위, 고정된 고리로 옮겼다. 그녀를 부축해주려고 했으나 그녀 스스로 휠체어에 탔다. 희박한 의지를 다해서. 내가 간병인 병실에 가있을 동안 의사가 와서 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줬다. 뻣뻣한 목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제일 먼저 휴게실에 갔다. 우리는 함께 야경을 보았다.
“이것 봐. 멋있지?”
“아파트만 보이는데.”
그녀는 별 감흥 없었다. 복도 끝에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복도를 쭉 지나치면서 3인실을 보았다. 복도 끝에는 불 꺼진 1인실이 있었다. 간호사가 보기 전에 우리는 비어있는 방에 재빨리 들어갔다.
“음, 좋네. 침대 봐. 나무야.”
그녀는 야경보다 1인실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녀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래봤자 병원이겠지만 침대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도달한 우리의 여정. 압도적인 절망감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생명. 나는 다른 곳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녀가 춥다고 했다. 다시 돌아온 병실. 그녀는 이번에도 휠체어에서 스스로 내렸다. 나는 그녀가 살 수 있지도 모르겠다는 허망한 기대를 품었다. 수희는 새벽에 마실 베지밀을 사오라고 했다. 5층 편의점에 가니 재고가 다 떨어졌다. 1층 편의점은 냉장 보관된 베지밀만 있었다. 결국 차가운 유리병에 담긴 베지밀을 맨투맨으로 감싸며 올라왔다. 나는 그녀한테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 먹는다고 너스레 떨었다. 수희의 입에 무화과를 잘라서 넣어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캐리어 앞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스프링 노트를 찢어 만든 쪽지가 있었다.
“내 장례식에 꼭 와주었으면 하는 사람이거든. 나중에 나 죽으면 네가 부고문자 좀 보내줄래?”
여러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혔다. 나는 그 이름을 훑었다.
“다 친구야?”
“지금은 보지 말고.”
그녀가 손을 뻗어 종이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내가 옆으로 비켰다. 나는 일부러 그녀가 잡을 수 있는 위치로 손을 옮겼다. 그럼 그녀의 손이 나를 따라왔다. 내가 그녀와 그런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작은 즐거움이 샘솟았다. 그러나 차마 마음 놓고 미소 지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힘이 빠졌는지 포기했다. 나는 그녀와 더 놀고 싶었는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쉬움에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반듯하게 접어 크로스백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