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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단발이 되었다. 내가 안 잘라준다고 하니 내가 샤워실에 가있을 때 스스로 잘랐다. 그녀는 머리가 가벼워서 좋다고 했다. 머리카락은 폭죽처럼 들쑥날쑥했다. 아마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고 최대한 바짝 자른 것 같았다. 도난당한 머리카락. 목구멍으로 북받치는 절망을 꿀꺽 삼키며 무표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분실된 부드러움. 내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에 맞닿았다. 이제 살과 살의 인사가 거침없이 가까워졌다.
무화과를 벗겨서 그녀의 입에 넣어줬다. 병원으로 오는 길목, 파란색 봉고트럭에서 한 봉지 샀다. 그녀는 나를 보자 퇴근한 아버지를 반기는 어린 딸처럼 반가워했고 당신이랑 먹으려고 가져왔다고 말하니 더 기뻐했다. 두더지 할머니는 우리 곁에 왔다. 남편에 대해 종알종알 털어놓았다.
“아들을 잘 키웠어. 우리 남편은 너무 무심해.”
남편은 건축시공과 조립식 판넬을 담당하는 파견직이었는데 평일은 기숙사에 있다가 일요일만 아내가 있는 병실로 올라왔다. 새벽에 남편을 깨울 땐 원래 이렇게 소변을 자주 보냐는 짜증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을 느꼈다. 간호사가 수희의 남은 링거액을 확인하러 왔다. 수희는 간호사한테 소변튜브를 달라고 했다. 분명 어저께 소변튜브를 받았어야 했는데 간호사가 까먹었다. 간호사는 곧바로 소변튜브와 팩을 가져왔다. 나는 커튼 뒤로 나갔다. 소변튜브는 환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커튼 안에서 고통을 호소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온몸이 경직된 수희가 눈앞에 그려졌다. 나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대변주머니를 달고 반쯤 죽은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는, 피폐한 얼굴의 아버지. 신음을 듣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낫겠다. 간호사도 조금 당황한 듯이 그녀를 달랬다. 수희는 계속 낑낑 앓았다.
“수희님, 제가 호스 구멍 크기가 작은 걸로 한 번 가져와볼게요.”
간호사는 나갔다. 나는 커튼 밖에서 말했다.
“힘들면 내가 소변기로 봐줄게.”
“새벽에 너 깨울 때마다 너무 미안해서.”
간호사가 잽싸게 뛰어왔다. 나는 간호사한테 소변튜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간호사는 나중에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하며 커튼 안으로 들어가 준비물을 챙기고 나왔다. 수희는 바지를 엉덩이에 걸친 채 돌아누웠다. 그 행색이 쓸쓸했다. 바지를 올려주었다. 코를 훌쩍였다.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댈 곳이 없었다. 그녀만 아팠다. 수희는 고개를 돌려 나보고 우냐고 물었다. 나는 안 운다고 했다.
휴대전화 속의 갤러리를 열어 그녀한테 보여주었다.
“이건 뭔 줄 알아? 정물화 놀이인데 집에 있는 컵이랑 접시랑 과일이랑 꽃이랑 가져와서 교수님이 준비한 식탁보에 각자 알아서 구도를 잡고 배치하는 거야.”
다른 폴더엔 수희의 사진이 있었다.
“이건 우리 둘이 놀러갔을 때. 잘 나왔지?”
“맞다, 나 영정사진 골라야 하는데.”
그녀는 담배피고 싶다고 말하듯이 무던하게 말했고 나는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의사 가운을 입은 젊은 간호사가 우리 곁에 다가왔다. 간호사는 하루 세 번씩 와서 체온과 혈압을 쟀다. 이번엔 지금까지 왔던 간호사 중에서 가장 어려보였다.
“수희님, 안녕하세요. 잠깐 체온이랑 혈압 좀 잴게요.”
수희는 지친 얼굴로 오른손으로 머리를 대고 왼팔을 내주었다. 밴드가 자기 팔에 채워지는 걸 보았다. 그녀는 간호사를 보았다.
“대학생이에요?”
여학생은 학생답게 웃었다.
“아니요. 저는 간호고등학교 다녀서 지금 실습 중인 고3이에요.”
“그래요? 얘도 고3인데.”
수희는 턱짓으로 옆에 서있던 나를 가리켰다. 여학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나한테 인사했다. 나도 얼떨결에 고개 숙였다. 여학생은 수희의 혈압치수를 볼펜으로 기록했다. 수희가 건조하게 말을 걸었다.
“힘들겠어요. 공부하느라.”
여학생은 손을 내저으며 입가에 부끄러움을 띄었다. 공손하게 인사하며 커튼을 닫았다. 나는 그녀 옆에 다시 앉았다. 영정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석식시간 전, 침대에 묻은 머리카락을 테이프 클리너로 치울 동안 수희는 이사장에게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병문안해도 되냐고. 병원 이름과 호실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희소식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했다.
“다다, 상현이도 온대.”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이사장은 무화과 한 박스를 들고 왔다. 나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인사했다. 오히려 그녀의 신의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는 상현이가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사장은 버버리 코트를 입고 왔는데 6인실은 처음 들어와 본 것처럼 병실 안 사람들을 보며 서먹한 표정을 지었다. 버버리 코트가 땅에 쓸리지 않게 벗으며 보호자 침대에 앉아 수희와 눈을 마주치며 낮게 물었다.
“왜 일인실 안 했어? 불편할 텐데.”
“일인실에 있으면 벌써부터 화장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사람들 목소리도 계속 듣고 싶고.”
나는 자리를 비켰다. 이사장이 멀뚱히 서있는 상현이에게 말했다.
“상현아, 너도 다다랑 잠깐 밖에 있어.”
나는 그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지도 않고 휴게실에 갔다. 병실 끝에 위치한 휴게실. 링겔대를 끌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자판기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텀블러에 정수기 물을 담는 간호사. 여분의 침상도 있었다. 창문 너머에는 초록색 옥상이 보이는 주택과 빌딩이 보였다. 파란색 쿠션의자에 50대 부부로 보이는 여성 환자와 남성 보호자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했다. 둘의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있었다. 남자는 몸을 여자한테 틀고 한 쪽 다리를 접은 채 머리를 괴며 웃었다. 남자가 어떤 농담을 할 때마다 여자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남자의 튀어나온 배를 찔렀다. 나는 맨 끝에 앉아있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까만 화면에 침울한 표정 하나가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리를 조금 벌린 채 허리를 숙여 컨버스 신발을 들여다보았다. 발목을 안쪽으로 굽히며 이리저리 살폈다. 한 달에 한 번은 세탁했는데 오래 신어서인지 맨 아래 착색된 더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상현이가 종이컵에 반으로 잘린 무화과를 들고 스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상현이는 내 옆에 앉았고 종이컵을 주었다. 나는 그가 준 종이컵을 스쿼시볼처럼 문지르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종이컵에 있는 무화과를 먹었고 나는 먹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여백이 생기면 그 전의 대화까지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간병 힘들지 않아?”
“괜찮아.”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멋쩍게 물었다.
“음료수 마실래?”
그는 괜찮다고 했고 나는 수희한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일어나자고 말하려는데 상현이가 내 발을 보며 불현듯 말했다.
“너 그 컨버스 되게 오래 신고 다닌다.”
“응?”
“입학할 때도 신은 신발 아니야?”
상체를 기울여 그의 신발을 보았다. 주로 포멀한 가죽로퍼를 신고 다니던 상현이가 나와 똑같은 블랙 척테일러 올스타 클래식을 신고 있었다. 상현이는 발목을 꼬아 최대한 의자 밑으로 발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이거 오늘 처음 신은 거야.”
“다시 봐봐.”
상현이는 그제야 발을 천천히 뺐다. 나는 상현이 옆에 내 발을 놓고 비교했다. 내 무릎이 그의 무릎보다 더 앞으로 나왔고 내 허벅지 길이가 더 길었다. 그는 나보다 한 치수나 두지수 작은 신발을 신었고 그의 하얀 신발끈은 소독약 냄새가 날 것처럼 뻣뻣했다. 아무 때가 타지 않아 반질반질한 앞코. 예전처럼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 앞코 위에 내 신발을 조금 떨어트려 올렸다. 그가 발을 피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그도 나를 보았다. 나는 농담하듯 물었다.
“밟아도 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나는 밟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따라 일어났다. 그는 외로운 표정이 되었다.
“이사장님이랑 무슨 대화했어?”
석식을 먹은 후, 무화과를 씻어서 꼭지를 뜯었다. 무화과가 균일한 크기로 고운 빛깔을 뗬다. 관상용 잉어의 꼬리 같았다. 맨질맨질하고 아름다웠다. 무화과는 살아있었다.
“이사장님한테 장례식 간소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나는 빵칼로 무화과를 반으로 잘라 그녀의 입 속으로 무화과를 넣어주었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다.”
“응?”
“너 상현이랑 싸웠어?”
그녀가 무화과를 다 먹을 때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입에 넣어주는 무화과를 먹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에 닿았던 무화과를 내가 대신 먹었다.
“이사장님이 그러셨어?”
“네가 상현이한테 미운 말 했다면서.”
그가 나와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이미 어머니한테 나를 고발한 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내 옆에 있으면서 자신이 한 선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이사장은 아들을 사랑했다. 우리는 다시 멀어졌다. 수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네가 간섭할 게 아냐. 둘이 행복하면 됐지. 우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빵칼로 무화과를 바닥에 대고 후벼 파고 있었다. 씨앗이 난도당해서 지그재그 모양의 칼날에 살점처럼 묻었다.
“경고하시더라. 너 그러다가 진짜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