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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다다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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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원 Sep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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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섯 시.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세월을 견디기 위해 실핏줄이 생겼다. 객석의자처럼 붉게 물드는 산. 바람은 소년처럼 뛰어내려 왔다. 나는 교복을 챙겨 입었다. 장례식장 1층 현관 모니터에 그녀의 사진과 이름, 유족 이름과 발인, 장지가 떴다. 유족 이름엔 내 이름뿐이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원로작가가 보낸 화한이 놓여있었다. 201호. 컨버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방이었다. 나는 유족이었지만 부의금을 하나 준비했다. 두더지 할머니 봉투에 있던 지폐였다. 이사장과 그녀의 지인으로 보이는 여성 세 명이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쪽지에 적힌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엉성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수희가 없으면 나는 엉뚱한 손님이었다. 이사장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며 그들에게 나를 수희의 아들로 소개했다. 그러자 그들이 일어나 어릴 때 봤던 그 아기가 이렇게 컸냐면서 어머니를 닮아 잘생겼다고 했다.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어서 힘들겠다고, 그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고 위로했다. 나는 고아였다. 앞치마를 맨 아주머니가 미리 준비된 쟁반을 들고 일회용 접시에 담긴 반찬과 육개장을 날라주었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국화향은 요란스러웠다. 박수처럼 조문객을 맞이했다. 앞서 누군가 피운 향로에서 연기가 났다. 죽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내가 찍어준 모습으로 화사하게. 갤러리 오너와 중견작가들, 수희가 큐레이터 시절 화랑에서 친했던 직원들과 컬렉터들이 왔다. 바퀴벌레처럼 기둥에서 한 명씩 나왔다. 모두 그녀가 아픈 줄 몰랐다고 했다.

입관식이 가장 두려웠다. 그녀의 시체를 본다는 게 무서웠다. 그들을 먼저 앞에 세우고 나는 맨 뒤에 따라갔다. 유리창 너머 차가운 은색 테이블에 수의로 쌓인 그녀. 병실에서 보던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짤막한 모조품처럼 누웠다. 인체 모형의 단백질 블록. 죽음은 비켜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전에 작별했다. 나를 플랫폼에 남겨두고. 내가 거기에 서있어도 그녀는 떠나고 있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걸쭉한 냄새가 났다. 썩은 냄새를 힘껏 덮으려는 알싸한 냄새. 그녀는 여기에 없었다. 귤처럼 말라버린 살 껍질. 그녀가 있는 곳의 물질세계와 이곳의 양자가 달라졌다. 나는 그녀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한테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그녀는 시련도 설렘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내 앞에 줄 서있던 친척들은 그녀를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식탁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소름끼쳐서 손을 바로 뗐다. 투박한 머리카락, 갈라진 입술, 옅게 보이는 흰자, 야윈 광대. 아무리 깨끗하게 시체를 닦았다고 해도 죽은 육체는 처참했다. 수의를 만졌다. 돌처럼 굳은 옷. 단순히 생명이 끊어져서 고통에서 해방된 상태가 아니었다. 다정하게 손을 만져도 반응이 없었다. 눈만 감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하는 상태. 그녀의 시체를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나무관 안은 아름다운 꽃으로 수북했다. 곧 불에 사그라질 만발한 얼굴들.

19

장례식장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사진으로 남았다. 바닥에 누워 그녀의 사진을 보았다. 발인은 버스로 오전 일곱 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다섯 시에 일어났다. 그녀의 영정사진을 내가 들었다. 어제 봤던 친척들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아이들도 보였다. 흰색 천으로 두른 나무 관. 장례지도사가 나에게도 흰 장갑을 나눠주었다. 이사장의 애인을 비롯한 성인 남성들은 흰 줄을 들어 링컨 리무진에 그녀를 실었다. 나는 링컨 리무진 조수석에 앉았다. 내 품에 있는 그녀의 사진은 너무 가벼웠다. 금색의 버스를 대절했고 친척들은 그 버스에 탔다. 추모공원. 어두운 목구멍 속으로 나무관이 빨려 들어갔다. 뜨거운 불이 그녀를 깨웠다. 이제 밤이 저물고 강렬한 빛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태울 것이다. 이사장은 관이 끝까지 들어가는 걸 바라보았다. 나는 바로 그녀의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울상인 얼굴로 몸을 돌려 내 품에 안겨 울었다. 나보다 키가 작고 체구도 작았다. 상현이처럼. 우리 사이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호수처럼 잔잔하고 느리게. 나는 그녀의 등을 이불처럼 쓸어내렸고 그녀는 곧 잠에 들 것처럼 울음을 그쳤다. 화장터는 텅 빈 질료의 수희를 파기시켰다. 납덩어리처럼 딱딱한 그녀를 녹였다. 불은 냉정하게 피어올라 그녀를 엄격한 온도로 다루었다. 그녀는 파괴되었다. 욕망과 육체. 그녀를 지탱하는 건 모두 버려졌다. 차츰 그녀는 육체가 아닌 감각으로 남았다.

수골준비중. 1층 로비 모니터 화면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을 때인데 이 시간에도 죽는 사람이 있었다. 죽음을 보는 가족이 있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영정사진 속 수희를 보고 지나갔다. 다른 유가족이 들고 있던 사진엔 노인만 있었다. 수희가 가장 어렸다. 쉰다섯이 이렇게 어린 나이인 줄 처음 알았다. 초등학생 아이들 다섯 명이 물방울 모양으로 떨어지는 분수대 앞에 둘러앉아 마피아 게임을 했다. 두 명은 일란성 쌍둥이 자매였고 세 명은 한 집의 형제였다. 아이들은 게임을 한 판 하고나서 문제점을 찾았는지 자기들끼리 모여 숙덕숙덕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아이들은 서로 네가 말하라며 무언가를 떠넘겼고 그 중에 머리를 하나로 올린 여자애가 용기 있게 다가왔다. 그 애가 하는 말은 사회를 봐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마피아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고 하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 게임이 정말 잔인하다고 느꼈다. 반드시 마피아를 골라야 게임이 시작되었다. 죽은 시민의 가족은 명분도 없는 죽음에 얼마나 비통하겠는가. 의사는 자기가 죽을까봐 시민을 살리지 않았다. 마피아는 선량한 시민처럼 섞여 있고 경찰이 마피아를 찾아내도 시민은 경찰을 의심했다. 그리고 이 역할을 고르는 내가 가장 이상했다. 마피아를 고른 건 나인데 나는 이 게임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시민 한 명이 죽으면 우리 모두에게 낮이 찾아왔다.

수골 후에는 친척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사장의 하얀색 영국제 SUV 세단이 앞에 서있었다. 이사장이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흰 천에 싸인 분골함을 무릎에 올려두었다. 정육면체 나무 상자는 수프처럼 따뜻했다. 사람이 가루밖에 되지 않았다. 이 안에 내가 만졌던 그녀의 육체가 들어있고 그녀를 지탱했던 뼈가 있다. 이걸 수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옆에 앉아서 운전하던 그녀가, 지금은 큐브처럼 작아져 내 안에 있다. 이사장이 말했다.

“상현이도 데려오려고 했는데 아직도 너랑 화해를 못했다고 안 오겠다고 하더라.”

나는 흰 천을 엄지로 쓸었다. 

“내일 오전 열 시에 징계위원회 열릴 거야. 꼭 참석해야 해.”

분골함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이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쾌쾌한 냄새가 났다. 거의 삼 주 동안 이 집에 들어온 사람이 없어서 그 사이 적막이 살고 있었다. 분골함은 식탁 위에 두었다. 누군가 사과상자를 선물한 것처럼 얌전히 놓였다. 집의 조명을 모두 끄고 저녁을 먹었다. 냉장고에 하나 남은 라이스크리스피바. 나는 수희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아폴로 11호에서 모티브를 딴 유리상판 테이블. 어제까지 사용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작품명과 작품가, 소장처가 적힌 목록표. 기획초대전 작품 컬렉션, ‘지난 전시 중 판매된 작품대금에 대한 결산을 하여 선생님의 농협계좌로 송금을 해드렸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중소형작품의 판매분 합계 60%, 대형작품의 50% 합계, 미수금 상태는 송금액에서 제외된 상태, 원천징수금액과 추가 송금 예정이라는 안내문. 작품이미지, 가격이 적힌 작품판매 내역서. 사업용 계좌와 주문 견적착오 추가비라고 적힌 메모지. 무통장 입금 타행 송금 확인증. 전시 내용을 적은 비평가가  ‘총 4매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보낸 글. 몇 시에 자문 완료했는지도 적혀있었다. ‘Enclosed Please find our cheque for US $ 500,00’견적서까지. 그녀의 사무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자리를 옮겨 갈색 수납장을 살폈다. A4파일들이 가지런히 꽂혀있고 날짜가 적힌 인덱스가 색깔별로 책등에 붙었다. 서가엔 작가들의 이름이 한글 혹은 영어, 한자, 불어로 적힌 전시도록과 월간미술, 미술과 비평, Auction&collector, Art in culture 잡지가 꽂혔다. 벽면에는 커다란 사무용 프린터기와 아날로기즘 스피커 한 대. 그 위에 버지니아 담뱃갑이 있었다.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빛이 목을 내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쓰던 침대, 화장대, 책상, 장롱 사이에 내가 있다. 장롱 하나에 사계절을 담은 옷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스커트나 드레스를 입었다. 로직패턴의 A라인 울치마, 히피스타일의 갈색 롱스커트. 브이넥 보라색 니트 드레스, 놀러갈 때 입었던 흰색 쉬폰 치마. 그녀가 인터넷에서 고민하며 산 옷도 있었다. 버들나무처럼 연하게 흔들리는 드레스. 흐느끼듯이 일렁이는 꿈. 프로젝트 창문엔 담장보다 높이 자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보였다. 누드 톤의 퀸 베드, 마르셀 브로이어 의자와 책상. 책상서랍 안에 낡은 종이상자가 있었다. 그녀가 받은 편지들이 한데 모였다. 편지지는 낡아서 누렇게 된 것도 있고 어제 쓴 것처럼 빳빳한 것도 있었다. 회사 이름이 아래에 적힌 편지지와 수채화로 풍경을 그린 편지지. 그 시대의 포만감이 느껴졌다. 편지를 열어 그녀의 청춘에 가담했다. 아버지한테 받은 편지가 전부였다. 그 편지의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나는 그가 쓴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질투보단 우울해졌다. 그녀한테 있어서 내가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다정한 문장들의 행진으로 인해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밀려나갔다. 이 방을 채우기 위해 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유품 정리는 네 시간 정도 걸렸다. 책상이나 장롱은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였다. 정리는 간단했다.

20

삼 주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음악실에서 학생재판이 시작되었다. 가장 위에 보이는 학교 교훈. No Standard. 이 방에서 보이는 정원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큰 사각 창문 바깥으로 산책로가 보였다. 불어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야외무대에서 공연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낙엽이 잘 구운 비스킷처럼 부대꼈다. 신난 학생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소리를 크게 지르며 이곳을 붙들어 맸다. 징계위원회는 어른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참여했다. 배심원석에 앉아있는 학생들과 검사석에 앉아있는 이민준의 표정은 똑같았다. 그들은 나의 음침한 죄를 한 가지 더 알고 있었다. 사건은 화제가 되었다. 견뎌야 하는 건 우리였다. 자극적인 사건의 문장. 그들은 스스로 설득이 될 때까지 불손한 상상을 이어나갈 것이다. 이민준이 말했다.

“원고는 정신적인 피해와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이에 보상으로 합의금이 아닌 피고의 소장품을 받길 원합니다.”

판사는 소장품을 어디에 쓸 계획인지 물어보았다.

“소장품은 개인소장으로 쓰지 않고 자선기금파티 경매에 출품할 계획입니다.”

내가 검사에게 물었다.

“왜 저는 상현이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

“그건 혐오니까요.”

“소장품까지 빼앗아야 해요?”

“소장품은 아까워하면서 원고의 인권은 생각 안 하셨습니까?”

“상현이 저보다 친구 많아요. 소수자 아니에요.”

“그건 주관적인 논리입니다. 법에 명시 된 대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디베이팅 외에 그들과 마음 놓고 시시덕거린 적이 없었다. 그건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매 순간 그들은 자신의 지성을 위해 열정적이었다. 그건 우아한 의식이었다.

“혐오금지는 단두대 같은 학칙이에요.”

“왜곡하지 마세요. 이 학칙은 단두대가 아니라 광장입니다. 학칙에 의거해 사람들이 차별하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합니다. 이곳엔 혐오가 있어선 안 되죠. 광장의 질서를 먼저 어긴 건 바로 피고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컨버스 신발을 보았다. 호모를 혐오한 죄와 어머니를 사랑한 죄. 나는 이곳에서 두 개의 죄를 양 손목에 매달아 벌을 받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학생들은 나를 보고 호모포비아라는 별명을 붙였다. 상현이가 만든 게 아니라 학생들이 상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학생들은 나를 외부에 놓은 채 상현이를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결집했다. 그들은 내숭을 떨었다. 

도서관에 모두 들어와 앉았다. 크리틱 교수는 오른손에 프라다 브리프 케이스를 들었다. 브리프 케이스 안, 파란색 클리어 파일에서 그림 한 점을 꺼냈다. 챕터1 테스트를 기준으로 더 이상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한 독일의 화가였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붉게 타오르는 대도시. 무질서한 움직임 때문에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건물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모두가 불타는 도시에서 캔버스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서두르는 모양이었다. 멀리서 이들을 치러오는 녹색 기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모두가 폭탄처럼 떨어지는 기차를 피해 달렸다. 소각장에 쌓여있는 책걸상처럼 대도시는 사람들을 민첩하게 다루었다. 일련번호를 적재하듯 사용했다. 양철통은 아무리 때려도 피가 나지 않지만 사람은 이빨이 빠지고 절규했다. 배고픔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들. 인간이 옷이나 빵 정도가 되는 곳. 사랑이라곤 본능 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 마저도 배고픔의 껍데기로 폐허가 되는 곳. 죽음은 죽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상현이는 수업이 마치기 이십 분 전에 얌전히 뒷문을 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학생들의 크리틱을 듣다가 오 분 뒤에 일어났다. 복도에 굴러다니는 농구공 하나를 점잖게 들고 1층 화장실로 내려갔다. 학생들은 모두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우드도어를 조심히 여니 끝 칸으로 다가갈수록 외설적인 소리가 들렸다. 구강과 둔탁한 물건이 미끈하게 교접했다. 한 칸만 잠겨있는 게 아니라 붙어있는 두 칸 모두 잠겨있었다. 나는 각각 문 앞에 귀를 대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제일 끝 칸 앞에 서서 자유투 자세를 잡았다. 그대로 슛.

“아, 씨발!”

이민준의 낮은 목소리. 나는 숨죽여 웃었고 그대로 화장실 밖을 나갔다. 모퉁이에 숨어서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화장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단단히 화가 난 이민준이 농구공을 들고 나왔다. 아랫도리는 불룩한 양감으로 솟아있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2층으로 올랐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Grooming Room’에서 상현이가 박하사탕처럼 생긴 고체치약 유리병을 세면대에 놓고 양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였고 나는 의미 없이 손을 씻고 그에게 말했다.

“어머니 잘 챙겨드려.”

상현이는 탐탁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입안에 있던 거품을 뱉었다.

집 앞에는 발판이 있는 하얀색 사각트럭이 대기했고 셔츠에 검은색 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짐을 싣는 접이식 카트, 전동 소형 지게차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작품에는 경매의 사인과 품목이 적힌 작품 보증서가 붙어있고 호리병은 끈으로 걸었다. 외장형 플래시를 터트려 DSLR로 사진을 찍는 사람. 검은 조끼 남자들이 백자대호를 날랐다. 하나씩 해체되었다. 경매사는 검은색 장갑을 끼고 돌아다녔다. 재질, 스타일, 모양, 장식 등 작품의 돋보이는 특징을 읊으며 책상에 맥북을 올려둔 여자에게 경매 목록을 워드로 작성 하라고 했다. 나는 수희가 담배필 때 앉던 철제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동안 나보고 사인을 하라며 와인색 표지의 위탁 계약서를 주고 갔다. 앞장엔 신상정보를 썼다. 사진 촬영은 스튜디오에서 한다는 내용과 일부 품목은 복원 작업에 동의한다는 내용 등이 있었다. 나는 위탁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불을 모두 끄고 책상 앞에 앉았다. 검은 바위의 시간. 가로등에서 뿜어내는 빛이 이곳에 들어왔다.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다. 예측해서 되감았다. 내 안에서 이미 변조된 그녀의 목소리. 실물로 남을 수 없는 입자. 퉁명스럽고 피곤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수화기 줄을 검지로 돌리듯 느긋하게. 너무 멀리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길고 가늘게 늘어졌다. 나의 신음은 슬픔을 낭송했다. 정원으로 가 노란국화를 모조리 뽑았다. 꽃들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세게 당겼다. 불쑥 뽑히는 몸통이 통통하게 살찐 벌레를 손톱으로 찍어 터지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자리 위에 수희의 분골함을 쏟았다. 바람 같은 하얀 가루가 흙 위에 덮였다. 텅 빈 몸에 가느다란 슬픔을 되돌려주었다. 꽃을 한 아름 안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욕조 바닥에 그녀의 긴머리카락이 붙어있었다.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물이 빠진 뒤에도 바닥에 남아있었다. 불과 그녀를 위해 태어난 나. 나의 아버지이며 어머니고 스승이자 연인이며 친구이며 아이였다. 욕조 안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다. 물이 차오를 동안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서랍을 열었다. 독일제 은색 가위를 들고 현관으로 갔다. 대문을 굳게 닫았다. 그러나 우리집엔 가져갈 게 없었다. 생각을 바꾸어 대문을 반쯤 열어두었다. 욕조에 돌아오니 물이 욕조의 절반 정도 차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밸브를 잠그고 뽑혀있는 꽃들을 욕조 안에 담았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꺾인 머리들. 교복을 벗어서 변기에 처박았다. 흙탕물이 된 욕조 안에 들어가 앉았다. 물을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카락처럼 달라붙는 국화들.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물에 적셨다. 그녀를 떠올리며 고통을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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